황거 바깥쪽 해자

-‘1948년 ‘메이데이 참가기’ 집필’ -
마쓰다 도키코의 해방 후 활동을 돌이킬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록이 있다. 재일조선인과 함께 메이데이 투쟁을 펼치며 목도한 현장의 분위기와 실상을 전하는 내용이다. 마쓰다는 이것을 ‘메이데이 참가기’라는 제목으로 집필해 1948년 ‘노동평론’ 6월호에 발표했다.

메이데이의 역사는 1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6년 당시 미국 시카고에서는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그들은 5월1일 전국적으로 투쟁을 벌이며 8시간 노동 실현을 요구했다. 하지만 5월4일 헤이마켓 광장에 모인 시위참가자에게 무장 경관이 폭력을 휘둘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자본가 측에서는 이를 계기로 8시간 노동의 약속을 파기한다,

“첫째 8시간은 일을 위해, 둘째 8시간은 휴식을 위해, 그리고 남은 8시간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라고 호소, ‘8시간 노동의 노래’를 부르면서 투쟁해 이룬 ‘8시간 노동제’다. 헌데 파기되다니 용납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은 더욱 조직적으로 시위 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세계를 향해 공동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이 움직임이 확산하자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 인터네셔널은 1889년 7월 창립대회를 개최해 “하루 8시간 노동을 법률로 인정, 5월1일을 국제데몬스트레이션의 날로 지정한다”고 공표한다. 이리하여 1890년 각국에서 제1회 메이데이 행사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민노총 자료 등 참조)

국내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조선 노동 총연맹’이 주도해 노동절 행사를 최초로 개최했다. 이후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 방지’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국제적 분위기에 호응했다. 조선총독부 감시 하의 체제에서도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

해방을 맞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결성됐고 1946년 20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대적인 메이데이 행사가 열렸다. 1950년 후반엔 정부가 대한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전신)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고 행사를 진행했다. 1963년 노동법 개정 시에는 명칭도 ‘근로자의 날’로 바꾸어 정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단체들은 노동절 되찾기 운동과 투쟁을 전개해 1994년 5월 1일로 재지정했으나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같은 자료).

일본에서는 1920년 5월 2일 우에노(上野)공원에서 약 5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최초로 메이데이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시위를 탄압하는 ‘치안유지법 17조 철폐, 실업 방지, 최저 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도쿄시전(市電) 쟁의지원’ 등의 안건이 참가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그 후 1935년 16회까지 각지에서 열리다가 36년 육군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미수사건(2·26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돼 행사 개최가 금지됐다.

일본 17회 메이데이(1946년)

하지만 해방 후인 1946년 다시 17회 메이데이 행사가 치러진다. 당시 도쿄의 황궁 앞 광장에 약 50만 명이 모여 ‘민주 인민정부 즉시 수립’과 ‘임금 인상’을 외쳤다고 하니 그 기세를 가늠할 수 있을 터….(신문 아카하타 2005년 4월30일 자 등 참조)

마쓰다 도키코 ‘메이데이 참가기’는 48년 19회의 메이데이 투쟁의 기록으로, 해방 후 3번째 열린 행사에 관한 체험적 서사다.

마쓰다는 당시 메이데이 투쟁의 안건이 ‘고용 불안, 노골적인 자본가의 횡포, 정부 측의 가해 행위’이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다수의 노동자가 황궁 앞 인민광장으로 속속 운집하는 풍경을 묘사한다.

도쿄역과 유락쿠초(有樂町)에서 광장까지 펼쳐지는 그 풍경이 두려울 정도로 거센 기세를 보이는 것이었다고 적는다. 나아가 ‘광장으로 몰려드는 노동자들의 얼굴빛과 육체에 찌든 영양부족과 과로와 남루한 옷’과 ‘저 높은 빌딩을 우뚝 세운 거리의 많은 통행인이 과시하는 일종의 득의양양함’을 대조하는 필치로 담아낸다.


-60만 명 참가자 조선인 대표 연설에 우레 박수-
마쓰다가 주시한 것은 플래카드다.

47년 18회의 메이데이 투쟁과 비교해 ‘전쟁 반대, 세계평화!’라는 글귀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 그게 일본은 물론 그해 세계가 내건 공통 테마임을 지적한다. 마쓰다의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쓰라린 패전을 경험했음에도 일본 시민이 원하는 평화는 정착될 조짐이 보이지 않거니와 노동자를 위한 정책도 반영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국노 아시다(芦田)정부 물러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지 않은 조합이나 단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패전 후의 일본 정부 중 그 매국적 행위와 반국민적 행위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지적받지 않은 정부는 없었고 그런 까닭에 시위와 항의를 받지 않은 정부도 없었다. 노동하는 국민은 초지일관 민주적인 국민의 정부를 추구해왔다. 그 염원을 담은 플래카드와 그것을 위한 최초의 불가결한 행보다.”

플래카드에 염원을 새겨 한결같이 흔들어대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노동전선의 즉시 통일!, 노동법규 개악 반대, 관헌의 폭압 반대, 세금은 분별없는 자본가에게!, 설탕을 조미료로 배급하라!”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 근로 시민과 자영업자, 노동자·농민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었다.

어찌 비민주적 정책에 분노하지 않고 잠자코 있을 수 있을까. 플래카드의 문구는 광장에 울려 퍼진 성난 노도와 같은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곳에 재일조선인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의문 속에도 ‘해외동포 귀환 촉진·생활 안정, 노동자의 문화창조·민족문화 수호’와 함께 ‘재일조선인의 자주 교육에 대한 부당간섭 절대 반대’라는 대목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마쓰다 도키코를 비롯해 국철, 전산, 기계, 금속, 일교조, 탄광 일에 종사하는 일본 노동자들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수호를 위한 주장에도 공감을 표한 것은 당연하다.

60만 명의 박수와 함성 속에서 재일조선인도 목청을 높여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 착취 없는 사회건설을 위해 더욱 확고한 투쟁태세를 확립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우리는 전 세계의 노동자와 함께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파괴하는 금융 자본가·파시스트의 음모를 타파, 자유와 평화와 독립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확보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재일조선인연맹 중앙본부(1946년 당시)

마쓰다는 재일조선인연맹이 해방 직후 생활 안정과 고국 귀향, 자주 조선 건설을 위해 일본 내지의 조선인들이 결성한 단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쓰다가 일본 농민조합, 사회당, 공산당의 대표에 앞서 문화단체 연합회와 재일조선인연맹 대표가 축사 연설을 한 사실을 강조하고, 조선인 대표의 호소에 광장을 뒤흔드는 박수 소리가 울려 펴졌다고 적시함에 주저하지 않은 이유이리라.

48년 5월1일 펼쳐진 일본 각 단체와 재일조선인의 메이데이 투쟁은 마쓰다에게 거대한 저항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메이데이 참가기’ 말미에 마쓰다는 1927년 처음으로 메이데이 투쟁에 참가한 때를 회고한다. 당시 시바(芝)공원 입구의 트럭에서 턱 끈을 하고 검을 찬 경관대가 행진을 하는 대열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폭력을 행사하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다.

마쓰다는 참가자들이 그들과 난투극을 벌이며 시위를 강렬히 전개했다는 서술을 잊지 않는다. 메이데이 투쟁이 그들의 강경 진압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저항운동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로부터 4년 후인 1952년 마쓰다는 ‘메이데이 연시(連詩)―소녀에게―’를 발표한 바 있다.

-소녀에게-
그대는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을 붉은 두건으로 두르고
스크럼은 단단히 단단히
발걸음은 강하게 빠르게
대열이여 차도든 인도든 빠져나가라

그대는 외쳤다
힘을 내라
노동자여 더욱 힘을 내라
그대의 아래턱은 둥글면서도 쐐기형
흙먼지로 범벅이 된 밤색 피부
부드러운 눈빛

외치면서도 방긋
노래하면서도 생긋
그대의 방향은 우리의 방향
우리의 저편은 우리의 광장
저기 수로여 성벽이여
눈앞에 보이지만 멀기만 하구나
눈앞에 보이지만 멀기만 하구나

발걸음 밑 대지는 잿빛 머리칼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깃발 끝은 창이 되고
대열은 모로 비탈길을 가로질러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평지로 나서면 가슴 가득 우렁찬 외침
곤봉·철 투구를 곁눈질하며
이 나라 이 대열 유린의 사명을 띠고
다가오는 자들 한 사람도
그대는 놓치지 않으리
우리도 놓치지 않으리
그때를 위해 앞가슴은 경종을 치고
우리의 머리칼은 깃발이 되고
우리의 목숨은 강철이 되는구나

저들은 무장한 채 무장차에서
권총을 겨누고 경적을 울리고
저 성벽 저편은 이미
저들의 화약 연기
저들의 총탄

수로 옆 잔디밭을 지나
돌 성벽을 기어오르는 대열 속 아낙들의 아래턱
소녀여 그대를 완전히 닮았구나.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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