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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한 편을 뽑으라고 하면 로베르토 베니니의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다. 아름답다는 말에는 ‘재미있다’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고, 아름답다는 말에는 ‘사라진다’ ‘빛난다’ ‘변한다’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요즘 대한민국 할머니 할아버지 배우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늙어도 아름답다. 늙어도 눈이 부시고 찬란하다.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는 제목이 끌렸고, 김혜자 배우를 보고 싶어서 넷플릭스를 클릭했다.
주인공 혜자는 어린 시절 바닷가 모래에서 손목시계를 발견한다. 이 오래된 시계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있다. 그 대신 시계를 돌린 자신의 신체 시간이 빨리 가게 되어 얻은 만큼 늙게 되는 등가 법칙이 적용된다. 기자 시험을 준비하는 26세 준하를 짝사랑하던 25세 혜자는 택시운전사 아버지의 사고를 막기 위해 시계를 돌려 아버지를 살려낸 후, 혜자만 78세 노인이 돼버린다. 늙어버린 혜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랑하는 준하의 아픈 청춘을 노인이 된 혜자가 곁에서 지켜보고 위로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반전이 가난한 골목이 있는 70년대 동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78세 혜자를 25세로 봐주는 동네 친구들과 가족, 그러나 혜자가 사랑하는 준하의 눈에는 할머니로만 보인다. 미장원을 하는 엄마와 택시운전사 아빠, 백수 오빠와 동네 중국집 친구, 가수가 꿈인 친구, 노인들을 상대로 건강식품을 파는 사기꾼들, 이런 인물들이 이웃으로 얽히며 드라마는 전개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꿈처럼 알츠하이머 환자, 혜자의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이다. 진짜 혜자의 인생은 통행금지가 있던 유신독재 시대, 신문사 기자 준하와 결혼하고 어린 아들과 행복했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안기부에 잡혀갔고 고문으로 남편은 죽고, 아들까지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어 억척스럽게 미용실을 하며 살아낸 요양병원의 할머니 혜자였다.
국민 엄마 배우 김혜자가 알츠하이머 환자로 기억을 잃어가는 한 사람의 삶을 연기한다. 반전의 반전이 계속되며 울고 웃게 하는 스토리의 전개와 한 컷 한 컷 일상의 아름다운 장면을 담아낸 연출, 배우들의 매력적인 감정표현은 끝까지 몰입으로 이끌었다. 환타지로 이끌었던 시계는 혜자가 결혼 예물로 준하의 손목에 채워 준 의미 있는 물건이었고, 기억을 잃어가는 혜자는 요양병원에서 남편을 고문해서 죽였던 그 안기부 공안까지도 용서한다. 며느리도 아들도 혜자의 기억에서 지워진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만을 기억하는 혜자에게 아들이 말한다.
“생각 안나는 건 기억 안하셔도 돼요. 그냥 행복했던 시간만 기억하세요. 행복했던 시간만.”
엄마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아들의 독백과 혜자의 목소리.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병 알츠하이머를 주제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그린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배우 김혜자는 80세다. 영화 ‘미나리’에서 한국 할머니로 출연한 배우 윤여정은 74세다. 그녀는 미나리의 대사에서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어. 대신 애써서 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77세의 오영수 배우는 아름답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골든글로브 연기상 수상소감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라고 담백하게 말한다. 노장 배우들의 메시지가 내면에서 공명한다. ‘아름다움은 발견하는 것’이라고. 오늘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현재’를 온통 느끼며 감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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