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광주경찰청 홍보계장

인사철이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 각자는 사무실이라는 장소를 공유하고, 시간과 동선은 파노라마같이 흘러가고, 여러 감정은 어지러이 교차한다.

필자는 머무르는 사람이다. 배웅하는 사람이자 환영하는 사람이며 관찰하는 사람이다. 가는 사람에게 안녕이라며 힘겹게 손을 흔든다. 오는 사람에게도 역시 안녕이라며 반갑게 두 팔을 벌린다.

고민 끝에, 필자는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뭐가 그리 아쉬워 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엉거주춤하고 있는 걸까. 솔직히 필자도 잘 모르겠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는 느낌, 수면은 고요하지만 내면은 출렁거린다.

햇수로 홍보계장 7년, 매일 아침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도로를 자동차로 출근했다. 순환도로를 타고 극락교(極樂橋)를 건너며 ‘낙원(樂園)’을 꿈꾸고, 공항 가는 길에서는 ‘비상(飛翔)’을 꿈꾸기도 했다. 주차를 마친 뒤, 터벅터벅 36개의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2층 사무실에 도착하고, 문을 열면 16개의 형광등이 일제히 나를 내려다본다.

남쪽으로 향한 책상과 의자에 앉아 동쪽 창문으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쳐다본다. 신문을 읽고, 스크랩된 기사를 정리하는 변함없는 하루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잔류가 허용됐을 때, 차일피일 미루어두었던 책상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큼지막한 쓰레기봉투를 구해다 놓고 옷장과 서랍에 가득한 잡동사니를 정리했다. 몸이 불어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옷들, 누렇게 색이 바랜 소모품, 유통기간이 한 참 지난 건강 보조식품과 감기약,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념품, 필기구, 서랍 한 칸 가득 쌓아놓은 무수한 명함들….

명함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 있다. 받은 수만큼 필자도 명함을 건넸을 텐데, 그들은 내 존재를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詩)처럼, 이제 필자도 그들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볼 참이다. 그래야 그들도 필자의 이름을 불러줄 터이니 말이다.

다음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놓은 서류 더미다. 중요한 것 같아 다시 읽어보려고 놓아둔 채 방치한 2017년부터 지금까지 각종 서류가 퇴적암같이 높다랗게 쌓여있다. 언론 예상보고, 진상보고, 정정보도 신청서, 주요회의 서류, 각종 연락처, 매뉴얼, 화보집, 팜플렛 등등 색상도 다양하다. 파쇄에 앞서 한 장씩 지면을 훑어보니 군데군데 개발새발 흘려 쓴 메모가 보인다.

“따뜻한 사람이 되자”는 문구…. 대학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가 술에 취해 울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참 차가운 것 같아.” 당시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울고 있는 친구에게 화를 낼 수 없어 가만히 듣고 만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차가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절하지만 차가운 사람, 유쾌하지만 냉소적인 사람, 인류애는 충만하지만 지인에 대한 동정심이 부족한 사람의 전형이랄까. 따뜻함은 태생적이고 본질적인 것 같다. 그래도 가끔 따뜻함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희망을 여기저기에 적고는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다. 그것은 미래의 것이며, 결코 과거가 되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책을 읽다가 가슴에 와닿은 구절이라고 생각해서 적어놓은 것 같다. 어렸을 적, 흑백 TV로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에서 오글거림, 더럽게 재미없다는 생각과 함께 ‘고도’가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걸까? 라는 궁금증도 들었다. 나중에 사무엘 베케트가 쓴 희극이고 ‘고도’가 누군지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다림’, ‘희망’의 속성이 그런건 아닐까?

이것저것 생각하며 차분히 책상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새하얀 메모지에 이런 구절을 적어본다. “새로운 시작이다. 가볍게,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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