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연 마을자치연구소 대표

지난 3월10일은 음력으로 2월1일 초하드렛날이었다. 흔히 ‘콩 볶아먹는 날’이라고도 하고,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많이 잊혀지긴 했지만 초하드렛날은 전통 세시풍속의 하나로, 이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돼 농사일을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은 매우 중요한 의례 행사가 마을마다 행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마을총회이다.

음력 2월1일은 민속 명절인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쇠고, 절기로는 입춘과 우수를 지나 봄기운이 뚜렸한 경칩과 춘분 무렵에 자리해, 온 누리에 새 기운이 솟아오르는 생명의 날이다. 정월 초하루 설날에 차례를 모시고, 세배를 드리며 조상님을 찾아 성묘를 올리는 것은 선조에 대한 은혜와 집안의 번성, 가족 간 화합과 우애를 다지는 씨족문화의 관습이다.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나물, 부럼을 나눠 먹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성스레 당산제, 동제를 모시고, 당산 굿으로 새해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온마을 집집을 돌며 지신밟기 굿과 고싸움놀이,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로 흥을 돋우고, 악귀를 쫓는 의식을 치러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했다. 설이 가족공동체의 유대 의식이라면, 정월대보름에서 정월 그믐날까지는 마을공동체를 단단하게 하는 연대의 시간이다. 그리고 2월 초하루, 초하드렛날을 맞이한다.

통일신라 이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유지됐지만, 중앙정부의 지방 통치력은 주로 군·현까지 미쳤으며, 면과 동·리는 오랫동안 주민들의 자율적 자치공간이었다. 그래서 동·리의 마을들은 동계, 상부계, 향약 등 자치적 규범과 상호신뢰의 규약으로 마을을 자율적으로 관리하고 화합과 상부상조의 윤리를 이어 왔다. 초하드렛날 모든 동리민은 마을마당에 모여 마을총회, 대중공사(大衆公社)를 열어, 1년 농사의 품삯, 머슴의 연봉, 수리시설의 관리, 동·리장의 선임, 당산제와 마을공동시설의 관리 비용 분담 등 마을공동체에 필요한 규칙과 책임을 민주적으로 토의 결정하고 시행했다.

이러한 마을총회의 전통은 자율적 자치적 마을공동체의 공론장으로 이어져, 지방자치의 부활과 함께 주민총회로 되살아나 풀뿌리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하는 마을자치의 핵심적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매년 주민들은 주민자치회를 중심으로 주민총회를 열어 마을의제를 결정하고, 마을계획을 수립하며, 마을축제로 화합의 자리를 마련하여 성숙한 민주주의를 마을에서부터 실천해 가고자 한다.

마을공론장에서 결정한 마을사업과 프로그램들은 주민의 눈높이에서 맞춤형으로 만들어져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로 마을을 발전 시키고 주민만족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이웃간 대화와 소통, 숙의의 확대는 차이와 소외, 갈등과 혐오가 심해지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를 치유하는 유력한 대안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 변동(2024)」에서 한국에서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적 퇴행은 공적 논쟁으로 합리화하는 힘이 쇠퇴해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모든 권력이 출발하는 주민 사이에 토의의 정치가 확고하게 발을 딛어야만 권력의 민주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한다. 토의의 공론장이 마을광장에 자유롭게 펼쳐져, 주민들이 자신과 이웃, 미래와 다음 세대를 위한 담론과 계획을 거침없이 논쟁하는 곳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힘이 커간다.

초하드렛날 마을 공론장의 전통은 우리가 소중하게 가꾸고 시대에 맞게 변용해야 하는 마을자치의 현대적 자산이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마을을 지켜내고 주민들을 살려낸 힘은 나라와 관청보다 이웃과 이웃의 도움과 배려, 마을 스스로의 자생력과 회복력이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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