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4(금)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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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변(無邊)의 들녘을 걷다 보면 생각의 무게를 내려놓게 하는 은은한 향이 공중에 퍼져서 몸에 배고 코끝을 간질인다. 잘린 볏짚 밑동에서 올라오는 이 냄새는 도시 골목의 어느 찻집 앞을 지나갈 때의 기분처럼 순간 걸음을 멈추고 흠흠 냄새를 맡게 한다.
그런데 이 볏짚의 향은 팔랑개비처럼 기분을 금방 즐겁게 할 정도는 아니다. 왠지 들뜬 마음을 가라앉게 하거나 돌아서서 걷는 마음속에 싱거운 음식의 맛이 남는 듯하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고 온 날의 여운이 옷깃에 묻어있는 듯도 하다.
마음속에 이처럼 향기로운 정이 한 줌이라도 존재한다면 인간의 포악한 욕망의 뿌리도 강물 속에서 용해되어가는 한갓 재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농로를 따라 돌아오는 낮과 밤의 산책길에서 베어진 볏짚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불현듯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의 놀라움이 있다.
콤바인이 훑고 간 자리에는 아주 가지런한 짚들이 긴 줄로 누워있는데 마치 스크럼을 짜고 광장에 누워서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는 성난 농민들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하고, 밤이면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이 고단해진 몸이 돼 하늘의 별빛만큼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로 짚 사이에 숨어서 자신의 소원을 기원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갈수록 사람에게 위로받을 일이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주 변하고, 물기가 없고, 줄 줄 모르고, 더군다나 측은지심마저 찾아보기 힘들 정도여서 사람 사이에 관계 맺기가 탱자나무 가시에서 탱자 따려는 것보다 더 어렵고 조심스러워질 뿐이다.
이런 우울한 생각이 드는 요즘 필자가 위로받기 위해서 꼭 찾아가는 곳이 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일부러 찾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시골에서 도시를 드나드는 출퇴근 시간에는 반드시 그곳을 경유하게 되어 있어서 더운 한숨을 내뱉고 하루의 어두운 찌꺼기를 토하게 해준다.
한창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는 그곳은 바로 화순군 한천면사무소 영외(嶺外)지소가 있는 앞마당의 은행나무 한 그루다.
나무 아래 떨어진 잎들은 달무리처럼 그리고 만월처럼 아주 아름답게 원을 그리며 놓여 있는데, 밤에는 더 몽환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섣불리 그 안으로 들어가 잎을 밟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잎은 필자의 가을의 뮤즈이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한 잎을 들어 동쪽 산마루에 비추면 푸르스름한 빛이 들고, 퇴근길에 한 잎을 들어 밤하늘에 비추면 순한 별빛이 스며든다. 필자는 이 은행나무에 매달린 모든 노란 잎들이 사랑스러워서 집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투명하니까. 그리고 몰입의 순간을 가져다주니까 더 그렇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얼굴에는 몰입의 시간이 가득 차 있다. 그 표정은 꼭 작가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과 혼자 있는 공간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얼싸절싸 싸돌아다니며 아무나 어울리거나 시간 허비하고 원고를 멀리해서 만들어진 얼굴이 아니다.
독서든 사색이든 글쓰기든 결국 혼자일 때 가능한 얼굴이다. 누구나 표정을 보면 작가로서의 그 사람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소설가 윤대녕은 그의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도서출판 푸르메. 2010)에서 「사람과 만나는 법」에 대해 그만의 짤막한 소회를 밝혔는데, 그는 “절기마다 그 절기에 맞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한 절기에 꼭 한 사람만을 만난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암튼 그 절기에 맞는 사람이 설령 열 명일지라도 그의 발상과 체험이 호기심을 가져다주기엔 충분했다.
11월엔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의 절기가 들어 있다. 필자의 지인 중에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있고 특히 눈을 사랑하는 이가 있는데, 돌아오는 소설(小雪)에는 마치 ‘길에서 만난 눈송이처럼’ 아주 극적인 상봉이라도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절기 속에는 과연 어떤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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