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4(금)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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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할머니의 전화번호라도 알아두고 싶어 이웃집에 갔다. 할머니는 나를 따듯하게 맞이해 주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경솔하고 단순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이야기 도중에 할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토방에 놓인 여러 켤레의 신발은 홀로 살아야 하는 할머니의 불안을 감추려는 의도였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신발코가 방 쪽으로 모두 향해 있었다. 할머니의 불안을 낮추기 위해 신발은 어떤 방향을 모색했던 것일까. 뒤축을 갉아먹는 길의 어둠처럼 신발은 낡았지만 불안이라는 덫이 잠복할 수 없도록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신발의 저 자세가 할머니의 평안을 지켜주고 안부와 안녕을 건네줄 것 같았다. 신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안’이라는 할머니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생활했다. 건강하고 조용한 성품에 언제나 독서를 즐겼다. 닮고 싶은 분과 이웃이 되어 우린 금방 친해졌다. 커피를 준비해 놓고 전화를 하면 나는 전날 읽었던 책의 감동스런 대목을 들고 할머니에게 뛰어갔다. 차렵이불 속에 발을 묻고 조담조담 책을 읽어 드리면 할머니는 귀를 기울이며 들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고왔다. 교과서에 나왔던 의좋은 형제처럼 우리는 돌담 너머로 갖은 음식들이 끼니때마다 오고 갔다.
언제부터인지 할머니의 속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왕래가 뜸해졌다. 죽이라도 쑤어다 드리면 조금씩이라도 드셨기에 염려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입 퇴원이 반복되었다. 자녀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차도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이웃집 할머니’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밤새 안녕이란 말을 절감하면서 갑자기 일어난,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할머니께 드릴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 글이 실린 책을 들고 병문안을 갔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볏짚처럼 야윈 모습이었다. 볏짚 같은 저 몸에 아직도 할머니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아련함이 있었는지 할머니의 눈빛은 맑았다. 한때 질주하는 청춘과 뜨겁게 달아오른 열정의 속도로 할머니는 아름다움을 꽃피웠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생의 내리막길에서 아파하는 할머니의 시간이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겨우 몸을 가누며 나를 반기던 할머니께 책을 안겨 드렸다. 뭉클하게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을 수도 없는 가냘픈 어깨와 맑디맑은 눈망울은 영원한 이별의 예고였을까. 며칠 후 장례식장에 갔다. 할머니 댁 문지방 위에 걸려 있던 사진이 장례식장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그 사진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장례가 끝난 어느 봄날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할머니 댁의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녀들이 집을 손질하기 위해, 의정부 안산 전주 여수에서 모두 내려와 있었다. 조용하기만 했던 집안에 훈훈한 수다가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풀밭이었던 화단도 깔끔한 옛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식들이 떠난 할머니의 빈집을 둘러본다.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어서 와요” 하며 할머니가 나올 것만 같은데 기척이 없다. 할머니가 심어 놓은 어떤 식물의 줄기에 터질 듯한 꽃들이 방울처럼 달려 있다. 토방에 놓인 신발처럼 단정하게 피어 있는 꽃은 할머니의 청춘을 끌어온 듯 화사하다. 꽃은 뒤축이 닳은 할머니의 뒤안길을 꽃색으로 다시 덮으며 추억하고 있는 듯 어여쁘다. 방울방울 달린 꽃들이 햇살에 눈시울을 적시며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반가운 할머니의 체취처럼 향기가 허공을 파고든다. 또 화단 한켠에는 철쭉꽃이 할머니의 환생처럼 피어나고 있다. 할머니를 지키겠다며 방 쪽으로 향해 있는 신발코처럼 철쭉꽃은 정오를 향해 꽃잎을 열고 있다. 꽃빛에 귀 기울이면 뚜벅뚜벅 걸어오는 할머니를 만날 것만 같다. 생전에 꽃을 좋아했으니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꽃들이다. “어서 와요” 하며 봄꽃들이 할머니처럼 나를 반겨주고 있다.
<오희숙 약력>
▲치유문학상 동시 최우수상, 서울지하철 문학상 수상
▲평택사랑 전국 백일장 수필부문 수상
▲산해정문학상, 신정문학상 수상
▲한실문예창작 회원, 향그런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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