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나한

철쭉을 담으려고 한라산에 올라갔다. 초입의 울창한 숲길을 지나 영실 고갯길로 접어든다. 멀리 아스라한 바다와 듬성듬성 오름을 보듬은 광활한 고원이 펼쳐지고 맞은편에 영실기암과 병풍바위가 우리를 반긴다. 영실기암에 얽힌 슬픈 전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한 어머니에게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죽을 먹이기 위해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다가 실수로 그만 어머니가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외출하고 돌아온 아들들은 어느 때보다도 맛있게 죽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귀가한 막내가 죽을 뜨다가 뼈다귀를 발견하고, 어머니 고기를 먹은 형들과 같이 살 수가 없다 하여 차귀도에 가서 바위가 되었고, 나머지 499명의 형제가 한라산으로 올라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영실기암을 ‘오백장군’ 또는 ‘오백나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벼랑 끝에 아슬아슬한 오백나한의 석고대죄(席藁待罪)가 애처롭다.

▲한류의 원조

영실기암과 병풍바위를 바라보며 계단식 고갯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어느덧 1500고지를 통과하고 있다. 카메라 배낭과 삼각대가 점점 무거워지고,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히며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가파른 계단 길이 끝나갈 즈음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여기저기 고고하게 서 있는 고사목의 자태가 의연하다. 구상나무는 주목과 달리 우리나라 고유 수종이다. 나무 이름을 ‘구상’이라 부른 것은 제주말로 성게를 나타내는 ‘구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구상나무의 잎이 성게의 가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구상나무는 1900년대 초 서양의 한 식물학자에 의해서 종자가 외국으로 반출되었으며, 개량종이 개발되어 지금은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인기가 높은 나무가 되었다. 구상나무는 그야말로 한류의 원조다.

▲천덕꾸러기

구상나무 아래 바위 사이사이로 조릿대(山竹)가 생명력을 자랑한다. 계단식 길이 끝나고 완만한 숲길을 벗어나면 선작지왓의 넓은 평원이다. 선작지왓은 ‘작은 돌밭’이라는 뜻의 제주도 말이다.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붉게 물들어 있어야 할 선작지왓 군데군데가 누렇게 떠 있다. 조릿대와 철쭉의 자리다툼이 심상치 않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조릿대 자생지가 점점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철쭉을 고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릿대는 조리를 만드는 난쟁이 대나무다. 조리는 쌀과 돌을 골라내는 기구로 복을 쌀처럼 일어 가져온다고 해서 복조리라고 불렀다. 복조리를 만드는 재료인 조릿대가 복은커녕 한라산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철쭉과 구상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는 조릿대를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온난화의 주범인 인간들의 주장이다.

▲건강진단서

선작지왓은 노루들의 서식지였다고 한다. 평원 한가운데 노루샘이 있다. 노루들이 뛰어놀다 목이 마르면 이곳에서 목을 축였을 것이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었다. 노루샘에서 잠시 바라보는 한라산은 가히 한 폭의 그림이다. 쪽빛보다 푸른 하늘로 여인네 가슴처럼 솟아오른 한라산 정상을 하얀 솜털구름이 휘감아 돌며 지나간다. 철쭉 꽃망울이 새끼 풍선처럼 터지기 직전이다. 고단함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 분기점까지 발길이 멈추지 않는다. 남벽 분기점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남성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한참을 보고 또 보고, 취하고 또 취해서, 담고 또 담는다. 이제 산행을 마무리하고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올라올 때 반겨준 친구들에게 차례차례로 아쉬움 속에 작별 인사를 나누며 내려온다. 1400고지 아래로 내려오자 처음 올라갈 때의 울창한 숲길이다. 내려올 때 들었네, 올라갈 때 듣지 못한 그 소리. 돌돌돌 물소리가 시원스럽고, 사각사각 나뭇잎 소리가 햇살을 간질이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무지개처럼 영롱하다. 숲속의 합주곡을 들으며 내려오는 발걸음이 천리라도 더 갈 것 같다.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려온다. “아직은 쓸 만합니다. 내년에 또 오세요.” 한라산 명의에게 건강진단서를 받아 들고 상쾌한 기분으로 영실 문을 나온다.

<김진환 약력>
▲‘산문의 시’ 문학에세이 등단, ‘산문의 시’ 시 등단
▲광주문인협회 회원
▲전남대학교 공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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