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영정

- 당나라 무령군소장이 되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전설이 된 인물들이 많다. 그중 한 분이 신라 말 청해진 대사가 돼 중국과 서역, 일본을 연결하는 바닷길을 장악한 장보고(張保皐, ?-841 또는 846)다. 그는 최근 바다를 다스리는 신 ‘해신(海神)’으로 부활되기도 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역사에서는 ‘바다의 신’으로 부활됐지만,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름의 한자 표기마저 제각각이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는 궁복(弓福)·궁파(弓巴)·장보고(張保皐)로 돼 있지만, 중국 기록인 ‘번천문집’과 ‘신당서’는 장보고(張保皐)로, 일본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일본 정사인 ‘속일본후기’에는 장보고(張寶高)로 표기돼 있다.

장보고가 살았던 당시 신라에서 평민은 성(姓)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장보고가 궁복이나 궁파로 불렸다는 것은, 그가 평민 출신이었음을 뜻한다. 궁복이나 궁파는 우리말로 ‘활보’ 즉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궁복 또는 궁파라고 불리던 신라 소년이 큰 뜻을 품고 당에 건너간 이후 중국식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궁(弓)은 중국의 다수 성인 장(張)으로 바꾸고, 복(福) 또는 파(巴)는 글자의 중국식 발음을 빌려 보고(保皐)로 표기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장보고의 이름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는데, 핵심은 그가 신라에서 성마저 갖지 못한 평민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장보고·정년 전’에도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라고 서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 청해진 대사가 되고, 한·중·일의 바닷길을 독점한 해상왕이 되었으니, 그의 삶이 더욱 드라마틱한 이유다.

장보고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동시대를 살았던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남긴 ‘번천문집’의 ‘장보고·정년 전’이 큰 도움이 된다. 두목이 남긴 ‘장보고·정년전’의 기록은 이후 ‘신당서’나 ‘삼국사기’ 장보고 기록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신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됐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후에 장보고는 신라에 귀국해 그 왕(흥덕왕, 필자 주)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신라 해로의 요지에 진영을 설치해, 해적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약탈해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왕이 (장보고에게) 1만명을 줘 요청을 들어줬다. 태화(太和) 연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인을 파는 자가 없었다.…”

‘번천문집’의 기록에서 보듯 장보고가 신라에서 당나라 서주로 와 군사 1천여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이 된다. 그가 군중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싸움 솜씨, 즉 신분이 아닌 능력 때문이었다.

-왕위 쟁탈전에 참여하다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는 해적 토벌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해 당과 일본뿐만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고, 아울러 큰 세력을 이뤘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둥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이를 적극 지원했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명 이상이 됐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성공한 장보고는 세력이 커지면서 경주의 중앙 귀족과도 연결된다. 흥덕왕이 재위 11년 만에 죽고, 김제륭(희강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해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줬다. 그러나 희강왕도 재위 3년 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이 스스로 민애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이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줘 김양과 함께 왕경(경주)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경주에 입성, 왕의 군대를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했다. 이 공으로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천호를 하사받는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됐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846년, 귀족과 신하들이 장보고가 신라 왕을 탐한다며 문성왕에게 경고했고, 결국 문성왕은 예전 장보고의 부하였던 무주(지금의 광주) 출신인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한다. 그리고 문성왕 13년(851),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전북 김제)으로 옮겼다.

왜 장보고는 피살되었을까? ‘삼국사기’ 문성왕 8년(846) 조에 장보고의 피살 장면이 다음처럼 기록되어 있다.

“청해진의 궁복이, 왕이 자기 딸을 들여 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웅거해 반역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토벌하자니 뜻밖의 환란이 있을까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가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모르고 근심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이 당시에 용맹과 힘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찾아와 말하기를 ‘조정에서 다행히 제 말을 들어준다면 제가 한 사람의 군사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다’고 하자,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나라에 반역한 것처럼 해 청해진에 몸을 의탁했다. 궁복은 장사를 아꼈기 때문에 의심도 하지 않고 이끌어 상객으로 삼고,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매우 기뻐했다. 술이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었다.”

장보고는 자신의 딸의 납비(納妃, 왕비로 들임)가 좌절되자, 이를 원망해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결행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동향의 염장에게 살해됐다. 장보고 딸의 납비를 둘러싼 문제가 국왕과 중앙 귀족 사이의 파워게임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납비의 관철 여부가 당사자인 장보고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납비가 좌절되면서 장보고가 모종의 대응책을 강구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그가 정치적 반란을 모의하거나 결행했던 흔적은 찾아지지 않는다.

장보고가 피살되면서 청해진도 해체됐고, 그곳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된다. 장보고 세력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싹을 자른 것이다.

장보고의 죽음에 대해 조선 전기의 인물인 최부는 ‘동국통감’에서 ‘도적과 같은 모략’을 받아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두둔하고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인물인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중상모략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단정하고, 장보고의 억울한 죽음의 책임을 중앙 귀족에게 돌리고 있다.

즉 장보고는 왕위 쟁탈전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됐고, 또한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딸 납비 문제가 중앙 정치권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결국 염장의 손에 암살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전락한다. 장보고는 당시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중앙 정치판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해신(海神)으로 부활하다
일본의 도당 유학승 엔닌은 그가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한 번도 친히 보지 못한 장보고가 자신의 구법 활동을 배후에서 도와준 사실에 크게 감사하면서, “한번만이라도 그를 친견했으면 하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장보고와 동시대를 살았던 당나라 시인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장보고를 안록산의 난 때에 활약한 곽분양에 비유하고 있다.

김부식도 ‘삼국사기’ 열전에서 장보고를 “진(晉)의 기해(祁奚) 또는 당나라의 곽분양에 비견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김유신 열전’에서는 “비록 을지문덕이 지략이 있고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서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했다”고 덧붙이는 등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최초의 장보고 연구자인 김상기 교수는 장보고를 우리나라 역사상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사를 지배한다”는 원리를 몸소 실천한 ‘해상왕국의 건설자’라고 평가했다.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하버드대학교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는 ‘해양 산업 제국의 무역 왕’으로 극찬했다.

반역자에서 ‘해신’으로 다시 부활한 장보고는 오늘 해상왕국으로 뻗어가는 한국인의 멘토가 돼 있다. 그가 산둥반도에 세운 적산법화원과 그가 건설한 해상왕국의 본영이 있었던 완도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최인호가 쓴 장보고의 일생을 그린 소설 ‘해신’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고, 2004-2005년에 드라마로 제작돼 국민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장보고가 오늘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와 동 시대를 살았던 당나라 시인 두목이 남긴 ‘장보고 정년 전’ 때문었이다.

그 기록은 그대로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나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 열전에 남겨졌고, 오늘 우리들에게 귀중한 역사의 원형으로 남았다. 그 역사 원형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어 줄 것이고, 새로운 장보고를 만들어 갈 것이다.

청해진 본진이 있었던 완도 장도 전경

청해진 본영으로 알려진 장도(완도읍 장좌리)에는 성터와 건물지가 남아 있고, 섬 둘레에는 300m가 넘는 당시의 목책(木柵)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 완도에는 거대한 장보고 동상도, 기념관도 남아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있다.

장보고 동상(완도군 완도읍)

장보고 기념관(완도군 완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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