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시인·시앤영 원장

잘 안되는 글을 애써 쓰고 있으려니 모든 게 죽을 맛이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고, 그러나 일부러 여유를 내어 독서를 시도해 보지만 오히려 집중력은 평소의 두 배 이상으로 떨어져 버린다. 심지어 겨우내 끈에 꿰어 처마 밑에 일렬로 걸어두었던 시래기를 걷어내는데도 끈이 자주 엉키고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이 사소한 것마저도 모두 엉클어진 집중력 탓인데, 냉정을 가장해서 정신을 추스르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필시 이유가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끔찍한 일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이게 해결되지 않고선 독서든 글쓰기든 소일거리든 자유롭지 못 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명절이 명절 같지 않은 경우는 올해가 처음인 것 같다. 다들 말수가 줄고 얼굴에 흥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무언가 감추려는 기운이 역력해서 서로가 조심스러운 표정일 뿐이다.

아이들만 여전히 순진해서 간혹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어 놓고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아준다. 어른들은 누구도 티브이 뉴스를 보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일부러 채널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보면, 한시름 놓은 탓인지 아니면 일말의 불안스러움을 드러내기 싫은 탓인지 입술을 철판처럼 굳게 다물고 있다.

어색한 분위기도 부담스럽지만, 다행스러운 건 명절 기간에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서 일찌감치 각자의 생활전선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긴 연휴 기간에 무료한 일상을 달래주는 건 역시 티브이 영화다. 때로 게으름은 평화로운 순간을 만끽할 여유를 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통쾌한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마침내 이 칼럼을 쓸 용기가 생겼다.

우리나라 감독이 개봉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이 서부영화를 ‘오마주’ 한 것인데 우리나라 서부영화 팬들에겐 제법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석양의 무법자’. 이 영화의 부제가 ‘추한 놈, 악한 놈, 선한 놈’이다.

결말에 이르러 세 명의 총잡이는 20만 달러를 독차지하기 위해 상대에게 총을 겨누는데, 결국 악한 놈이 먼저 죽는다. 왜? 악한 존재니까.

흥미로운 건 선한 놈과 추한 놈이 동시에 악한 놈을 향해 총을 겨눈 것. 하지만 추한 놈의 총엔 총알이 없는 거다. 선한 놈이 간밤에 총알을 제거해버렸기 때문.

감독은 추한 놈에게 총 쏠 자격마저 주지 않은 것이니 추한 자야말로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행실을 보면 도저히 믿을 만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요즘 들어서 보니까 그런 자들이 뉴스를 보면 자주 나오고 허구한 날 위선의 극치를 보여주느라 발광을 하는 짓들이 꼴사납기만 하다.

주인공 ‘클린트이스트우트’는 자기 몫만 챙겨서 유유히 사라진다. 이때 울려 퍼지는 배경음악이 그 유명한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휘파람 소리다.

머지않아, 그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환한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선한 사람들에게도 이 유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길 기대해보는 것이다.

필자가 닻을 내리고 10년째 정박 중인 마을은 너무 고요해서 별들이 가까이 내려와 눈을 맞출 때가 많다. 가로등은 먼 갈림길마다 고작 셋 정도이고 하염없이 고갤 숙이고 있으니 어둠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은 형국이다.

이곳은 대문이 없고 울타리가 없고 개를 키우지 않아서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런데 얼마 전 도시인이 지어 놓고 가끔 찾아오는 집에선 무지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와 마을의 고요가 깨져버렸다. 이 주인은 이기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한적한 마을을 일시에 개소리 하나로 점령해버린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아갈 만한 존재가 아닌 듯 싶은 것이다.

추한 자들이 국민의 정서에 반한 것이라면 이 자는 주민의 정서에 반한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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