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림 ㈜리얼프로텍 대표이사

5월이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새순이 돋는다. 450여 년 전인 1574년, 제봉 고경명은 광주목사 임훈의 초청을 받아 무등산에 올랐다. 음력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닷새 동안의 여정을 기록한 글이 <유서석록(遊瑞石錄)>이다. 증심사에서 출발해 입석대, 규봉암, 적벽을 거쳐 담양 소쇄원까지 이어진 이 여정에는 고경명 외에도 박천정·김성원 등 10여 명이 넘는 지역의 지식인들이 함께했다.

산행 시기는 지금의 5월 중순 무렵, 봄기운이 완연한 시기였다. <유서석록>은 단지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 아니다. 수려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 속에 자연의 결을 따라가는 감각과 정신의 절제가 공존한다. 제봉이 바라본 무등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시대와 민심, 그리고 자신이었다.

무등산 주변에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과 같은 정자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공간들은 자연 속에서 사유하고 토론하던 공론의 장이었다. 풍류의 공간이면서도 곧 정치의 공간이었고, 시를 읊는 자리이면서도 현실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무등산은 단지 하나의 산이 아니라, 생각과 말이 흐르던 문화의 지형이었다.

특히, 광주목사가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함께 산행을 떠났다는 사실은 이 만남이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조선시대에는 관료와 지역 지식인들이 산수 유람을 통해 민심을 살피고 시대를 논하던 관행이 있었다. 이 여정 역시 정사의 연장선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산(遊山)’은 단순히 산을 오르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을 벗 삼아 사유하고 성찰하는 여정이다. 산을 유람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묻고, 더 나은 삶의 길을 모색했다. <유서석록>은 바로 그런 철학적 행위의 기록이다. 자연과 풍경을 기록했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생각하고 시대를 성찰한 여정이었다. 이는 곧 ‘생각하는 포럼’이었고, 말 없는 공론장이었다.

포럼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문제를 논의하는 열린 장(場)이다. 단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고 함께 생각하는 자리다. 그리고 이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 공론이다. 공론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판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공론의 문화다. 다름은 많지만, 대화는 줄었고, 토론은 대결로 오해되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는 다시 ‘듣고 말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토론은 갈등을 평화롭게 푸는 기술이고, 포럼은 민주주의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방식이며, 신뢰는 서로 말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광주는 시대마다 질문을 던져온 도시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 모여 자발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했다. 시민 스스로가 자신들의 도시와 미래, 삶을 위한 선택을 논의했고, 그 분수대는 민주주의 공론장의 상징이 되었다.

무등산은 오래전부터 권력과 민심이 만나는 산이었다.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이 산에 올라 혁명의 정당성을 구했으나, 무등산은 쉽게 뜻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등산은 누구나 품어주는 너그러움을 지닌 산이면서도, 아무에게나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엄정함을 가진 산이다.

오늘날도 선거철이면 많은 정치인이 무등산을 찾는다. 대통령 후보나 국회의원, 지방선거 후보들까지 이 산을 오르며 지지를 호소하고 약속을 내세운다. 무등산은 말이 오가고, 공감이 시험 되는 공론의 현장이자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무등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산이 간직한 공론과 포럼의 정신을 이해하고, 경청하는 정치를 실천하는 일이다. 무등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가 다시 묻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에 기대기보다, 그 산이 품은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무등의 진짜 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포럼의 정신을 되살린다면 소통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