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햇살은 맑고 투명하다. 마치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수정 조각을 햇빛 아래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것처럼 세상의 모든 색깔들을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결을 타고 온 동네를 산책하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달콤하고 은은하게 콧속 깊숙이 스며든다. 갓 움튼 여린 연둣빛 잎사귀들은 어느덧 짙고 푸른 녹음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 싱그러움 속에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여름의 활기찬 숨결마저 완연하게 느껴진다. 공기는 점점 더 습기와 함께 부드러워지고 겨우내 차가운 공기로부터 지켜준 두툼한 외투를 벗어 던지고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옷장은 채워진다.

하지만 이 5월의 산책길에서 강해지는 햇빛을 피해 나무 밑 한가운데 문득 멈춰 서있자니, 지난겨울, 기온은 점점 차가워지고 공기 중 습도는 줄어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목 끝까지 여몄던 셔츠의 바스락거리는 촉감, 그 위를 포근하게 감싸주던 니트와 묵직한 코트, 부드럽게 목을 감싼 목도리의 질감까지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겨울옷들을 겹겹이 레이어드하며 만들어냈던 섬세한 스타일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 나를 보호해 주는 갑옷이자 동시에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성큼 다가온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두툼한 겨울옷들을 세탁하여 옷장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이 옷들과 함께했던 따뜻함과 포근함은 다시 만날 가을과 겨울을 위해 소중하게 보관해 두고, 시원한 여름옷들을 꺼내어 옷장의 공간들을 채운다. 묵직했던 겨울의 흔적들을 말끔히 정리하는 순간, 어느새 변하는 계절을 느낀다.

5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 하늘하늘 산책을 하면 작년 겨울의 날카로운 공기가 뜬금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앙상한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마지막 남은 몇 잎의 낙엽들. 다가올 모진 추위를 숙연하게 받아들이고 굳건히 견뎌내려는 자연의 숭고하고 담담한 의지가 느껴졌던 풍경이다. 모든 잎을 떨궈 낸 텅 빈 가지들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며 다가올 봄을 위해 준비한다. 날카로운 바람과 새하얀 눈 풍경 속에서 드디어 한 해의 계절을 마무리한다. 나 역시 한 해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지난 시간들을 되새김질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그때는 추위가 싫어서 봄의 햇살이 그리웠지만 아직 6월이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차가운 공기가 그리워진다.

어느덧 5월, 싱그러운 초록빛은 더욱 짙어지고,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가 은은하게 바람을 타고 날아올 때가 되면 벌써 1년이라는 시간도 절반 가깝게 지나버렸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겨우내 추위를 피하며 연말을 보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시간은 쉼 없이 흘러 어느덧 뜨거운 여름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마치 봄의 씨앗을 뿌리고 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풍성하게 자라난 곡식들을 수확하는 가을처럼, 그리고 모든 생명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고요한 겨울처럼,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자연은 늘 계획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5월이 지나면 어김없이 6월,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할 것이고 7월과 8월의 무더위를 견디면 무더위의 끝이 보이는 처서가, 자연의 예정된 스케줄 대로 움직일 것이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5월의 그늘 속에서 느끼는 이 특별한 그리움도 9월이 오면 또 다른 계절의 추억으로 덧칠되어 일상 안에 잔잔하게 기억될 것이다.

<박형진 약력>
▲신정문학 등단
▲광주문인협회 회원
▲동양계장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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