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2(일)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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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살아남은 자들이고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살아남은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고,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살아남은 자로서의 해석을 교환 중인 것이다. 죽은 자들이나 죽은 것들이 자리에 초대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말하지 못한다.
탄핵, 경제 위기, 전쟁, 양극화…. 격렬하게 나누는 이야기 안에는 명분과 의무, 그 비슷한 무엇이 또 들어있다. 그것들은 무거운 그늘을 드리우고 많은 이들이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다르게 사는 이들도 있다. 명분과 의무, 그 비슷한 무엇이 몸과 정신을 잔혹하게 짓밟아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오로지 살아남아야 하고, 우선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후자가 이 세계의 더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아남아야 하는 세계가 내내 심상치 않다. 올봄의 어느 날 갑자기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더니 이틀 후 눈이 쏟아지고 영하가 됐다. 그 서슬에 꿀벌의 70% 넘게 목숨을 잃었다. 꽃은 가득 피었지만, 꿀벌의 날갯짓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징후였을지도 모르는데, 우린 그에 대해 깊이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징후가 그것 말고도 많았을 텐데, 격렬하고 선명한 명분과 의무가 자리에 먼저 초대되었다. 보이지 않는 징후들은 환히 보이는 것들보다 형편없이 가벼운 무게를 지닌 것들일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일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거대한 거울의 방이 되고 말았다. 굴절된 우리의 입이 사방에 반사되어 누가 말하는지, 누구의 말을 깊이 들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거울은 진짜가 아닌 것들을 끝없이 복제하여 우리 눈동자 속으로 강압적으로 집어넣고, 우린 그렇게 들어온 가짜를 정보로 만들어 머릿속에 쌓아두고 거울의 방에 함께 갇힌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한다. 가짜는 계속 증폭된다. 그런 시간이 길게 흘러가고 있다.
서편이 붉어졌을 때 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지구는 둥글고 햇빛은 대기를 거쳐오는 동안 굴절되어 우리에게 온다. 해는 이미 졌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징후 너머의 것을 보아야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는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생 내내 세계의 위치와 모양, 성질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살다가 끝날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과 색과 성질은 세계의 본질적 모습이 아니라 굴절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굴절된 것들 가운데 우리는 지금 당장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서너 개 선택한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더 굴절이 일어난다. 선택된 것 어느 것도 선택되지 않은 것을 대변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다른 것들을 대변하기 위해 탄생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을 대변할 뿐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그 안에 든 모든 것들이 그렇다. 예외는 없다.
어린 물총고기는 부모에게서만 물총 쏘는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 형편없는 물총 실력을 지닌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부모의 기술만을 배웠다가는 굶주리게 된다. 어린 물총고기들은 굴절을 탁월하게 계산하여 실제 위치에 정확하게 물총을 쏘는 물총고기를 따라다니며 기술을 배운다.
말들도 굴절된 것들이다. 굴절된 세계를 보고 만들어낸 말이 어떻게 굴절되지 않겠는가. 굴절된 말의 음모를 꿰뚫고, 세계의 굴절 정도를 계산할 수 있는 자만이 세계의 진상을 깨달을 수 있다. 깨달았다고 해서 꿀과 행복이 그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굴절된 세계를 믿는 광신도들 속에서 이단적 광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힘없는 존재들에 대한 애린愛隣을 품길 바랄 뿐이고, 용서는 언급하지 말기를 바란다. 용서는 언제나 가해자와 가진 자들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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