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시신을 거두다
조선시대 사림의 영수(領袖)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과거 합격 5년 만에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오른다. 그는 도교 관청인 소격서 폐지, 새로운 관리 등용 제도인 현량과 실시, 반정 공신들을 공신록에서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급격한 개혁에 피로감을 느낀 중종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훈구세력은 나무 잎사귀에 꿀을 발라 새긴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고 역모죄를 씌웠고, 능주에 유배시킨 후 사사(賜死)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부른다.

양팽손 영정

조광조가 유배와 사사된 곳이 학포 양팽손의 고향인 화순 능주, 관노 문후종의 집이었다. 양팽손은 기묘사화 당시 소두(疏頭)가 되어 조광조 등을 위해 변론하다 파직당한 후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조광조의 유배지였던 능주면 남정리와 양팽손의 고향 집 도곡면 월곡리와는 10여 리가 채 되지 않은 거리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함께 합격했을 때였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고, 함께 조정에 나아가 뜻을 합하였다. 마지막 근무지도 같은 사헌부였다. 조광조가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이었고, 양팽손은 정5품 사헌부 지평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훈구세력에게 밀려 양팽손의 고향인 능주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12월, 삭풍을 뚫고 양팽손은 매일 조광조를 찾아 위로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한 달을 채 넘지 못했다. 의금부 도사 유엄이 사약을 갖고 도착했기 때문이다. 유엄이 사약을 갖고 도착하자 의관을 정제한 후 찾은 분도 양팽손이었다.

조광조가 죽자, 양팽손은 장남 응기,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와 함께 시신을 거두어 쌍봉리 뒷산 증리에 가묘를 쓴다. 당시 역모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 일로 장남 응기는 벼슬길이 막혔고, 양산보는 벼슬을 포기하고 소쇄처사를 자처하며 소쇄원에서 일생을 보낸다. 양산보는 양팽손의 재당질(再堂姪, 6촌 형제의 아들)이었다.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은 가묘 언덕 아래에 죽수사(竹樹祠)라는 사당을 지어 봄‧가을 제사를 올린다. 오늘은 터 비만 세워져 있다.

조광조는 성균관에서 양팽손과 함께 공부했다. 이때 양팽손에 대해 “내가 양팽손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고 하였고, 또 기상을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인품을 칭송했다.

-촌스러웠지만 강직했다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梁彭孫, 1488~1546)의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며 본관은 제주다. 손수 지었다는 호 학포는 포은 정몽주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여 ‘포은을 배운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조부는 증 사복시정 양담이고, 부친은 증 승정원 좌승지 양이하다. 어려서는 조부와 부친에게 글을 배웠고, 집 가까이에 있는 쌍봉사에서 책을 읽었다. 학포는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글재주를 지녔다. 전라도 관찰사가 능주 순찰을 나왔다가 양팽손의 글재주를 듣고 불러 ‘천지일월(天地日月)’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도록 한다. 이에 양팽손은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天地爲吾量)/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되니(日月爲吾明)/ 천지와 일월은(天地與日月)/ 모두 장부의 일이라(都是丈夫事)”라고 읊는다. 지금 이 시는 학포당 주련(柱聯)으로 걸려 있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는 “해학의 모습이요(海鶴之資)/ 추월의 정기라(秋月之精也)/ 뒷날 용문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크게 떨치리라(他日龍門大闡)”라며 덕담을 해 준다. ‘용문대천(龍門大闡)’은 문과 급제를 말한다.

학포당(화순군 이양면)

양팽손이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달아실)로 이거한 때가 14살이었고, 그리고 이듬해에 지지당 송흠을 만난다. 양팽손은 송흠의 조카였던 송순, 나세찬 등과 함께 송흠 문하에서 공부하며 바른 뜻을 품는다.

1510년(중종 5) 조광조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6년(중종 11)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그리고 받은 첫 관직은 홍문관 정자였다. 다음 해에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 형조좌랑으로 옮겼다가, 11월에 받은 관직은 정6품직인 사간원 정언이었다. 과거 합격 1년 만에 청요직인 사간원 정언에의 임명은 파격이었다. 그가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급제 당시 성적이 월등했고, 성품 또한 강직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합격 갑과는 합격자 중 1~3등에 해당된다.

당시 사관(史官)은 그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처럼 논했다. “양팽손은 한미한 집에서 나와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전에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에서 공부할 때 벗들이 그의 촌스러움을 헐뜯었으나, 강직하다는 이름이 있어 시론(時論)이 혹 허여하였으므로 이 벼슬을 얻게 되었다.” 학포 양팽손, 그는 출신이 한미했을 뿐 아니라 촌스러운 스타일이었지만, 성적이 뛰어났고 기죽지 않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을 탄핵한 일로 대신들의 견제를 받아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조광조‧김정 등 신진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1519년(중종 14) 3월,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다.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1519년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해였고, 양팽손에게도 운명의 해였다.

동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양팽손은 상소의 주동자인 소두(疏頭)가 되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결과는 파면이었다. 그가 다시 고향 능주에서 유배 온 조광조를 만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고, 조광조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다.

-학포당을 짓다
학포 양팽손과 깊은 인연이 있는 장소는 세 곳이다.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와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이 그곳이다.

이중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은 조부와 부친이 살았던 곳으로, 현재 제주 양씨들의 중시조를 배향한 충덕사가 있다. 도곡면 월곡리는 1440년대 중반 양팽손의 조부인 양담이 이거해 오면서 제주 양씨들의 세거지가 된 곳으로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고, 쌍봉리는 어린 시절과 벼슬에서 물러나 학포당을 짓고 여생을 보낸 곳이다.

‘학포당 전집’의 연보에 의하면 양팽손은 능성현(지금의 능주) 쌍봉리에서 출생했다고 적고 있으면서도, 광주의 이장(泥場, 지금의 양과동)이라는 설도 있음을 부기하고 있다. 양팽손은 어린 시절 쌍봉사에서 수학하는 등 쌍봉에서 자란 것으로 보아 쌍봉에서 태어났거나 부친이 살았던 광주 양과동에서 태어나 쌍봉으로 이사 온 것은 아닐까 싶다. 이후 월곡리로 옮겨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4년여의 짧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에는 쌍봉으로 돌아와 학포당을 짓고 여생을 보낸다.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 학포당이 지어진 해는 1521년(중종 16)으로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사된 2년 뒤다. 원래는 초당이었다. 이후 유실되자, 이를 기억하기 위해 ‘학포 양팽손 유지추모비’를 만들어 세웠는데, 글씨는 면암 최익현이 쓴다. 1922년 학포당이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중건되자, ‘추모비’는 학포당의 뒷담 밑으로 옮겨진다.

기묘사화로 관직 문이 막힌 양팽손의 즐거움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친구들과 교유하는 일, 독서하고 시 짓는 일, 고기 잡는 일 그리고 새로 찾은 취미인 그림 그리기였다. 학포당이 건립된 후 지은 다음의 시는 당시 양팽손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초막집을 비로소 강 위의 산에 지어놓고(草屋初開江上山)/ 강가에서 날마다 고기를 낚아온다(江干日日釣魚還)/ 평생 이 강의 승경을 독차지하니(平生擅有玆江勝)/ 하늘이 주신 한가로움에 길이 감사한다(長謝天公早盅閒).”

학포당을 짓고 난 후 개울가에 나아가 고기도 잡고, 풍경도 감상한다. 시에 묻어나는 양팽손 삶의 포인트는 ‘한가로움’이었다.

그의 한가로움을 달래준 또 하나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다. 그의 산수화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지금 그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격조 높은 산수화인 ‘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팽손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산수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도비가 두 개인 이유
양팽손이 학포당에서 은거한 지 20여 년이 지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고, 57세에 받은 마지막 관직이 용담 현령이었다. 용담은 지금 전라북도 진안군 일대다.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한 후 이듬해인 1545년(인종 1)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나이 58세였다.

화순에 남은 학포 양팽손의 흔적은 학포당만이 아니다. 그의 무덤이 이양면 쌍봉리 중조산 중턱에 있고, 묘소 가기 전 입구에 제각인 영모재가 있다. 그리고 영모재 앞에는 양팽손의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울 수 있는 비다. 그런데 학포 양팽손은 벼슬이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에 그쳐 신도비를 세울 수 없었다. 여기에 세워진 신도비는 자식을 잘 둔 덕분에 세워진 신도비였다. 양팽손의 3남 양응정이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르자, 1578년(선조 11) 부친인 양팽손의 벼슬이 종2품인 이조참판으로 증직된다. 무덤 입구에 신도비가 설 수 있었던 연유다. 후손들은 이 신도비를 ‘절혜 전 신도비’라고 부른다. 절혜(節惠)란 죽은 사람에게 마지막 은혜를 베풀어 그 시호를 내려 주는 일을 말하니, 절혜 전 신도비는 양팽손이 ‘혜강’이란 시호를 받기 전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양팽손 절혜 전 신도비

1842년(헌종 8), 양팽손은 정2품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863년(철종 14)에는 ‘혜강(惠康)’이란 시호도 받는다. 이에 후손들은 1897년(고종 34) 증직과 시호를 받은 사실을 추가하여 다시 쌍봉마을 입구에 신도비를 세운다. 이를 ‘절혜 후 신도비’라고 한다.

절혜 후 신도비

그가 청년 시절을 보냈던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는 그를 제사지내는 부조묘(不祧廟)도 있다.

양팽손 부조묘(화순군 독고면 월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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