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산 33번지의 묘 앞에는 아무런 글도 새기지 않은 조그마한 비석이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비석을 ‘백비’(白碑)라 부른다. 백비의 주인공은 장성 출신으로 1514년(중종) 과거에 급제한 후 한성부판윤과 지중추부사에 오른 아곡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다. 그는 38년간 관직에 근무하면서 변변한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가 죽자 ‘조선왕조실록’(명종 9년 1월28일자)의 사신(史臣)도 박수량의 청렴을 ‘남쪽 선비의 으뜸’으로 평가했다.

장성군청에 건립된 박수량 백비

박수량에게 내려진 시호는 ‘정혜’(貞惠)다. 여기에도 그의 청빈한 삶이 온전히 녹아 있다. ‘정혜’는 청백으로 절개를 지키는 ‘청백수절’(淸白守節)과 백성을 아끼며 즐거움을 같이하는 ‘애민호여’(愛民好與)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글도 새기지 않은 그의 묘비명은 청렴한 그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박수량은 세상을 떠나면서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사람을 보내 장성 집 살림을 조사케 한 명종도 박수량의 청빈한 삶에 감동해 서해 바다 암석을 골라 하사하면서, 박수량의 뜻이 훼손될까 염려해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고 명한다. 비에다 글자를 새겨 그의 청렴을 말하는 것 자체가 그의 청렴했던 삶에 흠이 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그는 명종 1년과 6년, 두 번이나 청백리에 선정된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였다.

-한성부판윤만 세 번 임명되다
백비의 주인공 박수량은 1491년(성종 22) 전라도 장성현 소곡리(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에서 부친 박종원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다. 어릴 적 고을 선생 김개에게서 수학했다. 본관은 태인(泰仁)이고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이다.

박수량 생가 및 부조묘(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한 후 받은 첫 관직은 성균관의 분교인 광주(廣州) 향교의 정9품직인 훈도였다. 중종 10년(1515)에 승정원 부정자에 임명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병조좌랑, 사헌부 장령을 거쳐 정3품직인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한다.

박수량은 당대 으뜸가는 효자였다. 1525년(중종 20) 늙은 부모 봉양을 위해 청해 받은 관직이 고부군수였다. 이때 부친상을 당한다. 이후에도 어머니 봉양을 위해 보성군수, 나주목사, 담양부사를 지낸다. 담양부사 시절, 모친이 이질로 위독하자 몸소 약을 달이느라 수십 일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곱똥을 맛보아가며 병환을 간호했다.

1542년(중종 37) 모친상을 당하자, 예를 지켜 한 걸음도 묘소를 떠나지 않았으며 상복을 벗고서도 애절해마지 않았다. 그리고 삭망제(朔望祭,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사)와 제사에도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3년상을 마치자 조정의 명령이 누차 내려왔지만, 편두통을 앓고 있었고 또 귀가 어두워 출사하지 못했다.

1544년(중종 39)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장성(당시는 영광) 기영정에서 판중추부사 송흠을 위한 잔치를 베풀면서 “전라도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치고, 그 다음은 박수량을 친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세간의 평에 힘입어 그는 다시 천거돼 중용된다.

1546년(명종 1) 정2품 지중추부사에 오른 후 의정부 우참찬, 호조판서가 됐다가 1553년(명종 8)에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된다. 한성판윤 임명은 세 번째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54년(명종 9), 병이 들어 졸(卒)하니 향년 64세였다.

- 하서 김인후, 묘지명을 쓰다
38년간 관직에 근무했던 아곡 박수량의 트레이드는 ‘청렴’이다. 그러나 청렴만으로 박수량의 인간 됨됨을 다 평가할 수는 없다. 박수량이 어떤 분이었지를 알려주는 것 중 하나가 하서 김인후가 쓴 박수량 묘지명(墓誌銘)이다.

후일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는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출신으로, 황룡면 아곡리 출신인 박수량과는 지척이다. 김인후가 1510년생이니, 1491년생인 박수량이 19년 선배가 된다. 먼저 관직에 나아가 청렴의 명성을 얻은 박수량은 김인후의 멘토였다. 박수량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봤던 김인후는, 박수량이 사망하자, 박수량의 일생을 정리한 묘지명을 쓴다.

다음 묘지명은 박수량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준다.

“공(박수량)은 평생을 통해 그의 몸가짐이 간결·엄중·신중·치밀했으며, 모든 행동을 예법에 맞게 하되 자신을 극복하는 데 더욱 힘썼다. 공의 성품은 얌전·겸허하여 행동에 근신하였고, 체질은 의복 무게를 감내치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뛰어난 문체를 지녔으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고, 주량은 한정이 없었지만 자제하여 지나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것같이 했고, 고향에 있을 때에는 오직 겸허한 자세로 언제나 출입을 삼갔다.”

몸가짐이 간결·엄중·신중·치밀한 분, 성품은 얌전·겸허해 행동에 늘 근신한 분, 뛰어난 문체를 지닌 분, 주량은 한정이 없었지만 자제하여 지나치지 않은 분이, 우리가 아는 아곡 박수량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박수량은 이미 살핀 것처럼 부모님 공양을 위해 외직을 간청하신 분으로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담양부사 시절 이질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해 “바쁜 공무에도 허리띠 한번 풀지 않고 몸소 약을 달였고, 어머니 곱똥을 맛보아가며 병의 차도를 구분하신 분”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서 김인후의 묘지명에 나온다.

-상여멜 돈마저 남기지 않았다
묘 앞 백비는 아곡 박수량이 어떤 삶을 사신 분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왕조실록’(명종 9년 1월 19일)에 실린 박수량의 졸기(卒記)다.

박수량이 죽자, 명종은 “염근(廉謹, 청렴 정직)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내 매우 슬프다. 특별히 치부(致賻, 부의를 보냄)하라”고 명한다.

또한 사신(史臣)은 그의 삶을 다음처럼 요약해서 싣는다.

“(박)수량은 호남 사람이다. 초야에서 나와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여러 번 지방에 보직을 청하였다. 일 처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그의 아들이 일찍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그는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 하였으며, 그 집도 10여 칸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중종께서 특가(特加)로써 포장하여 지위가 육경(六卿, 6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저축이 조금도 없어서 처첩들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으므로 대신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비록 덕망은 없었지만, 청백의 절개 한 가지는 분명히 세웠으니 세상에 모범이 될 만했다.”

한 인간의 삶이 완벽할 수는 없다. 사관의 긍정적인 평가는 ‘청렴’, ‘염근’, ‘일 처리의 치밀함’이었고, 부정적인 평가는 ‘덕망’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오늘 박수량이 주목받는 이유는 덕망 때문이 아닌 공무원이 실천한 청렴 때문이었다.

박수량이 사망하고 10여 일 후인 동년 1월 28일, 대사헌 윤춘년은 조강(朝講)에서 명종에게 “죽은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할 때도 남의 집에 세들어 살았습니다. 본래 집은 장성에 있는데 그 가속들이 상여를 모시고 내려가려 하나 그들 형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이 사람을 포장한다면 청백한 사람들이 권려(勸勵, 권하고 장려함)될 것입니다”라고 아뢴다.

이에 명종은 “박수량의 집이 곤궁하여 상사를 치를 수 없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 역시 어렵다 하니, 일로(一路)에 관인들로써 호송케하고 상수(喪需, 초상 치르는데 드는 비용)를 지급하라”라고 명한다.

대사헌 윤춘년의 말 속에도 박수량의 청렴이 진하게 묻어 있다. 서울에 살 때도 남의 집에 세들어 살았고, 장성 고향집까지 상여 멜 돈마저 남기지 않았다는 보고가 그것이다.

-장성에 남은 흔적들
오늘 박수량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무덤과 무덤 앞에 선 백비만이 아니다. 그를 기리는 신도비도, 사당도, 명종이 내린 99칸 집의 흔적도 다 박수량을 기억하고 있는 기림물이다. 박수량의 신도비(神道碑)는 주자창에서 무덤을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서 있다. 신도비 비명은 연재 송병선이 찬(撰)하고, 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썼다.

박수량 묘소 입구에 건립된 신도비

아곡 박수량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은 두 군데에 있다. 모암서원(慕岩書院)과 수산사(水山祠)가 그것이다. 장성 최초의 서원인 모암서원은 1587년(선조 20) 장흥 서씨의 시조인 서능을 배향한 서원으로 1648년(인조 26) 중건될 때 박수량 등이 추가로 배향된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1976년 서능의 묘소가 있는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용암마을에 용전사(龍田祠)를 별도로 건립, 배향하고 있다. 모암서원의 옛터에는 박수량 등 7위를 기리는 단과 단비만이 남아 있다.

박수량 묘소와 백비 전경

박수량을 모신 또 다른 사당 수산사는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 위치하고 있다. 수산사는 1833년(순조 3) 돈재 박연생과 교리 김개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수산리에 처음 창건했다가, 1868년 훼철된 후 1977년 현 위치로 옮겨 지을 때 박수량이 추가 배향된다. 김개는 박수량의 어릴 적 스승이었다.

명종은 박수량 사후 그의 청렴을 기리기 위해 백비를 하사하고, 고향 하남골에 99칸짜리 청백당(淸白堂)을 지어 준다. 명종이 지어 준 청백당은 정유재란 당시 불타 없어지고 하마석(下馬石)과 유허비만 남아 있다.

박수량 청백당(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박수량을 기리는 흔적 하나가 또 있다. 장성군청에 서 있는 백비가 그것이다. 박수량의 청렴을 본받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백비는 장성군청에만 세워져서는 안된다.

전국의 모든 관공서에 박수량의 백비를 세우면 어떨까? 오늘 여전히 또 다른 박수량을 보고 싶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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