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껍질과 해녀의 물질도구인 테왁, 그리고 제주라는 섬의 기억. 형광빛 주황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선희 작가의 11번째 개인전 ‘아무튼, 한라산부터 시작합시다’가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은 주황빛으로 가득 물들어 있다. 작품 속 고양이들은 해변을 거닐고, 귤을 따고, 배를 타고, 탐험을 떠난다. 이 고양이들은 작가가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팬데믹 시기 사람을 직접 그릴 수 없었던 시절의 대안적 존재다.

작가는 2020년 가족과 함께 제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감각은 작업의 방향을 바꿨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제주를 단순한 풍경이 아닌 기억과 감각, 사라짐에 대한 예술적 탐구의 장으로 확장한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제주 시리즈’는 탐라순력도의 구조를 차용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풍경을 한 화면에 담았다.

“현재에는 있지만 과거에는 없었던 것들, 과거에 있었지만 사라진 것들, 그리고 미래에 사라질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은 시간의 층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전시된 7편의 작품에는 알작지해변, 협재해수욕장, 쇠소깍, 새별오름, 거문오름, 김녕해수욕장 등 제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가 담겼다.

특히 ‘알작지해변’은 작가 작업실 뒤편에 있는 작은 해변으로, 벚꽃 아래 단체사진을 찍는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전시의 또 다른 축은 AR 영상 작품 ‘잊혀진 숲’이다. 틸트 브러쉬(Tilt Brush)로 구현된 가상현실 속 숲은 비자림로 확장 공사로 사라진 제주 비자림숲을 되살린다. 이는 기술이 기억을 보존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징빛이 가득한 귤밭별밭’은 제주 시리즈 중 유일하게 밤을 그린 작품이다. 중산간 언덕 위 귤나무 사이로 번지는 빛은 하늘의 별이 아닌 바다의 오징어잡이 배 불빛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양림동에서 휴가를 떠나듯, 제주를 다른 감각으로 만나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오는 17일까지.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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