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학원농장 하얀 메밀밭 아래쪽에 코스모스가 울긋불긋 피어 하얀 메밀꽃밭이 돋보인다.

가을은 1년 중 가장 걷기 좋은 계절이다. 날씨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들판에서는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고, 길가에서는 울긋불긋 핀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같은 야생화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산에서는 억새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황금빛 들판과 청초하게 핀 가을꽃들이 풍요롭고 아름답다.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 메밀도 하얗게 꽃을 피운다. 메밀꽃을 생각하면 1936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을 배경으로 쓴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른다. 평창군 봉평면 메밀밭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전국 곳곳에 경관용으로 메밀밭을 조성해 놓은 곳이 많다. 경관용이라 하지만 메밀을 수확해 소득을 올리는 것은 물론이다.

전라도에서는 고창 학원농장과 장흥 선학동에서 메밀을 많이 재배한다.

봄철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고창 학원농장은 가을철이면 하얀 메밀꽃밭으로 변신한다. 메밀꽃 피는 시기에 맞춰 고창 학원농장을 찾았다. 이효석은 하얗게 핀 메밀꽃을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고 묘사했다. 고창 학원농장에 도착하니 하얀 메밀밭 아래쪽에 코스모스가 울긋불긋 피어 하얀 메밀꽃밭이 돋보인다. 봄철에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곳에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었다. 봄철 청보리밭은 메밀꽃밭으로, 유채꽃밭은 코스모스꽃밭으로 바뀐 것이다. 메밀꽃은 화려하기보다는 은은하고, 강렬하기보다는 은근하다. 완만한 경사를 지닌 구릉지에 드넓게 펼쳐지는 메밀꽃밭은 부드럽고 잔잔하다.

메밀꽃은 화려하기보다는 은은하고, 강렬하기보다는 은근하다. 완만한 경사를 지닌 구릉지에 드넓게 펼쳐지는 메밀꽃밭은 부드럽고 잔잔하다.

메밀꽃밭과 코스모스꽃밭은 멀리서 고창 외곽의 산줄기와 주변의 구릉지들이 다가와 풍경미를 더해준다. 메밀밭에는 구불구불 사잇길이 있는데, 오늘 아침까지 내린 비로 땅이 질컥거려 사잇길 걷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꽃밭 가운데로 구불구불 나있는 사잇길을 걷는 묘미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바깥쪽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신발에 달라붙는 진흙에 아랑곳하지 않고 빨간 양산을 쓰고 메밀꽃밭을 걷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군계일학처럼 돋보인다.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를 개간한 학원농장은 면적이 33만여 평에 달한다. 이곳 학원농장은 영화와 드라마, CF촬영지로도 인기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폭싹 속았수다’, ‘연인’, ‘도깨비’, ‘백일의 낭군님’ 같은 작품을 촬영했다.

학원농장은 2004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청보리밭축제와 메밀꽃잔치를 연다.

전망대를 지나 전봇대에 노랗게 표시된 ‘여백의 길’ 표식을 만난다. 학원농장 메밀꽃 구경을 마치고 ‘여백의 길’로 들어선다. 농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메밀꽃밭이고, 오른쪽은 넓은 콩밭이다. 메밀꽃밭과 콩밭을 가르는 농로를 따라 걷는데 노면에 도깨비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학원농장에서 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한 것을 기념해 시멘트 노면에 도깨비 그림을 그려놓았다.

학원농장을 뒤로하고 길지 않은 숲속 산책로를 따라서간다. 숲 가운데는 작은 연못들이 있다. 연못에는 연방죽, 오리방죽 같은 이름도 붙여져 있다. 방죽에서는 시들어버린 연잎들이 가을을 보내고 있다. 여름철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다.

숲속 산책로 가운데는 작은 연못들이 있는데, 연방죽, 오리방죽 같은 이름도 붙여져 있다. 방죽에서는 시들어버린 연잎들이 가을을 보내고 있다.

연방죽을 지나니 황금색 논이 발아래에 와있다. 봄철 모내기를 마친 논은 한여름을 보내면서 햇볕과 비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벼로 성장시켰다. 풍요로운 들판이 되기까지는 농부의 땀방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의 기운이 들어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청농원에 들어서자 핑크뮬리를 중심으로 코스모스, 백일홍, 억새 같은 꽃들이 가을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청농원 2만여 평 농원에 5천여 평에 걸쳐 조성된 핑크뮬리 정원은 사뭇 몽환적이다. 핑크뮬리는 억새와 비슷하게 생겨 분홍억새라고도 부른다. 핑크뮬리는 가을에 분홍빛이나 연한 자줏빛 꽃이 피어 핑크빛 물결을 이룬다. 핑크뮬리는 10월 초부터 3주 정도 핀다.

청농원에 들어서자 핑크뮬리를 중심으로 코스모스, 백일홍, 억새 같은 꽃들이 가을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핑크뮬리는 가을에 분홍빛이나 연한 자줏빛 꽃이 피어 핑크빛 물결을 이룬다.

핑크뮬리 정원이 잘 조성된 청농원에는 옛 정취를 간직한 한옥 술암제(述庵齊)가 자리하고 있다.

핑크뮬리 정원이 잘 조성된 청농원에는 옛 정취를 간직한 한옥 술암제가 자리하고 있다.

술암제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배종혁이 조부를 위해 1943년 지은 건물로 고즈넉한 한옥의 멋을 느끼게 해준다. 청농원에는 카페도 있어서 핑크뮬리 물결에 취했다가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다. 청농원은 5월 하순에서 6월까지 보라색 라벤더꽃밭으로 변신한다.

청농원 아래쪽에 청천마을이 자리했다. 맑은 개울가 마을이라는 뜻의 청천마을 앞에는 오래전에 커다란 예전저수지가 생겼다. 여백의 길은 예전저수지 수변을 따라 이어진다. 예전저수지는 논과 구릉지에 감싸여 있다. 저수지 안쪽 논에서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저수지 갓길을 걷다가 종종 낚시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황금색 논 뒤로 학원농장의 메밀밭도 바라보인다. 저수지 주변 밭에서는 땅콩을 캐거나 고구마를 캐고 있는 농부들도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저수지 갓길을 벗어나 구릉지 밭길을 따라서간다. 주변 밭에서는 김장용 배추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배추밭 아래쪽으로 평산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다.

콩이 익어가는 밭과 황금색 논, 낮게 솟은 구릉지들이 질박한 고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밭길을 걷다가 마을 쪽으로 내려오니 2차선 도로가 기다리고 있다. 잔뜩 흐린 날씨는 가끔 가랑비를 흩뿌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주변에서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북쪽에 촛불산(199.6m)이 우뚝 솟아있다. 해발 2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들판 가운데 있으니 높게 보인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수원마을 앞 농로로 들어선다. 추석을 앞두고 있어 고향을 방문하는 출향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마을 앞 논에서 황금색으로 출렁이는 벼들이 자랑스럽다. 추석을 이틀 앞두고 있지만 마을은 평상시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수원마을경로회관을 지나 농로를 따라서간다. 동쪽 멀리 넓게 펼쳐지는 들판 뒤로 방장산에서 축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길가에서 피어있는 돼지감자꽃과 나팔꽃들과도 빙그레 인사를 나눈다. 콩이 익어가는 밭과 황금색 논, 낮게 솟은 구릉지들이 질박한 고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땅이야말로 만물이 살아갈 터전이다.

평촌마을을 지나 복흥마을로 향한다. 고창군 공음면 복흥마을은 전남 영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10여 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 입구에 복흥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 앞 논에서는 벼들이 익어가고 있다.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장갑수·여행작가>

※여행쪽지
▲학원농장에서 복흥마을까지의 여백의 길에서는 학원농장의 메밀꽃과 청농원의 핑크뮬리를 만날 수 있고, 소박한 마을과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코스 : 학원농장→청농원→청천마을회관→수원마을경로회관→평촌마을회관→복흥마을회관
※거리, 소요시간 : 9.8㎞, 3시간 소요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고창 학원농장(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길 154)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