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6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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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박사의 뮤지엄 읽기] (12) 히바에 두고 온 24년 전 나의 유물
실크로드, 아직도 남아있는 아련한 기억의 수장고를 찾아

  • 입력날짜 : 2018. 07.04. 19:13
지난달 26일 24년 만에 실크로드를 방문해 사마르칸트 리게스탄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
우즈베키스탄을 처음 찾은 건 1994년 겨울이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나란히 하고 있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던 필자는 유학 온지 3개월 만에 과감한 도전을 했던 것이다. 1991년에 소련에서 독립하긴 했지만 정세는 불안했고 그것만큼이나 치안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카자흐스탄 친구들마저도 혼자 여행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사코 말리곤 했다. 한 겨울인데다 러시아어도 어눌한 상태였으니 그런 우려는 필자를 더 위축하게 했다.

한국박물관협회 기획연구실장·문화학 박사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아직도 사회주의의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거리며 공원에는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이 영욕의 한 시대를 유물처럼 간직한 채 어수선하게 남아있었다.

우리나라나 카자흐스탄이나 학생신분은 공인된 특권이 있었다. 당시 우리 돈으로 350원짜리 학생용 승차권을 사면, 뜨람바이라고 불리는 두 칸짜리 전차와 지붕에 귀뚜라미 촉수 같은 두 가닥의 통 전깃줄이 역시 두 줄의 전기궤도에 의지해 달리는 트롤레이부스라 두 칸짜리 무궤도 버스를 한 달 내내 마음대로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시내만을 오가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또한 타고난 역마살은 여러 가지 우려들이 더 이상 핑계가 될 수 없게 했다.

여행계획은 물론 변변한 안내책자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실크로드의 한복판이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우르겐치)임을 알고 있었기에 무모하게 알마티 기차역으로 향했다.

허름하기 짝이 없던 기차역이었지만, 기차를 타면 국경을 넘어 모스크바는 물론 유럽까지도 갈 수 있기에 이곳이 국제(International)역이라는 사실은 신기하기만 했다.

이곳에도 사회주의는 있었다. 기차역에서 표를 끊으면 그 돈이 국가 것이 되지만, 칸칸이 배치된 전담 승무원에게 슬쩍 돈을 주고 타면 그 승무원이 챙기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원리를 알아차린 필자는 승무원을 잡고 어눌한 러시아말을 걸었다. “난 한국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이다. 좀 태워 달라” 좌우 눈치를 살피더니 4인실 침대칸 한 자리를 내줬다. 물론 정식승차요금의 반 정도에 말이다. 여행하는 동안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지은 죄가 있는 승무원은 나를 완벽하게 보호해 줬다.

이틀을 달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중앙아시아 여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꾸일육시장과 국립우즈베키스탄역사박물관 등을 돌아보고 사마르칸트 행 열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호텔도 여타의 숙소도 변변치 않았던 당시, 기차는 돈 없는 유학생의 이동수단과 숙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해질 무렵에 기차를 타면 마침 동이 틀 새벽녘이나 아침에 다음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에 스케줄 맞추기 또한 용이했다.

1994년 겨울 히바에서 필자와 세르게이(좌).
우즈베키스탄의 겨울추위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그날의 사마르칸트 행 열차는 입추의 여지라고는 전혀 없는 만원이었다. 2인실, 4인실, 8인실 침대칸은 동나고 내부 전체가 칸막이 없이 침대로 가득한 객실에 침대하나를 겨우 잡았다. 그런데 객차 유리창이 깨져 나간 곳이었다. 뻥 뚫린 창문으로 몰아치는 바람은 시베리아에서 맛본 혹한의 잔인함 그 자체였다. 소떼같이 달려드는 추위는 가방에서 모든 것을 꺼내 몸과 발을 칭칭 감싸도 몸을 점점 얼어붙게만 했다. 바람의 직격탄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재주 좋게 잠이든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또 아이들의 칭얼거림, 동승한 닭이며 가축들의 울음소리, 매스꺼운 냄새 등은 1937년 겨울, 우리 동포들이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에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의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박 추위에 떨며 동틀 무렵에 마주한 사마르칸트는, 필자에게 왜 여기까지 오는데 이런 고통을 주었는지를 알게 했다.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던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도시, 실크로드 교역의 핵심기지로 번창해 중국 남북조시대와 수·당을 거치며 강국의 입지를 확고히 했던 땅, 14세기에는 티무르 왕조의 수도가 된 찬란한 영화의 오아시스, 정말 기대이상의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시 부하라 행 열차에 올랐다. 몸은 지쳐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사마르칸트 리게스탄 광장과 비비하눔 모스크의 화려한 타일장식은 아니었지만 사막 한복판에 흙으로 조성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유적은 또 다른 생경함과 감흥으로 다가왔다. 정말 좋았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목적지인 히바로 향했다. 몸은 말할 수 없이 지칠 때로 지쳐 그로기상태가 되었다. 어딘가에서 며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무렵, 옆자리로 마침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앉았다.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이름이 세르게이인 이 친구는 우르겐치 역에서 히바 중간쯤에 산다고 했다. 이것저것 말을 나누다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자기 집이 넓으니 며칠 쉬었다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 그 집을 찾게 되었다. 사막 한복판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미숫가루 같은 흙먼지가 발목까지 날리던 신작로를 걸어, 도열한 전봇대 그림자가 제 키 보다 3배쯤 될 무렵에 도착한 세르게이의 집은 정말 허름한 흙집이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평온함 속에서 저녁을 맞이하던 대가족의 일상은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방문에 대소동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르게이 할아버지와 부모님, 형님내외, 형제, 조카들에게 인사를 하자 이내 저녁상이 차려졌다. 거친 호밀 빵과 푸성귀로 버무린 샐러드, 양고기 스프, 직접 짠 우유 그리고 반주로 내온 보드카는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어느 화려한 그것보다 정성이 더해져 각별해 보였다.

더 먹으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차마 손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연거푸 받아 마신 보드카의 취기는 피로에 지친 몸을 더욱 녹여 내렸지만 차마 자고 싶다고 말을 꺼낼 수 없게 했다.

이후 내어온 말린 과일과 차를 또 마셔야했고,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얼마나 크던지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세르게이와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우즈베크어를 했기에 필자가 러시아어로 말을 하면 그걸 받아 다시 가족들에게 통역을 해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긴 식사자리가 끝나자 혼기를 앞둔 세르게이의 누나가 혼숫감으로 준비해 둔 것 같이 깨끗한 이부자리를 꺼내 정성껏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아랫목까지 세숫대야에 씻을 물과 수건을 가지고 와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그 정성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한사코 하루 더 쉬어가라는 가족들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짐을 두고 세르게이와 인접한 히바로 나섰다.

그리고 들어오는 길에 걸음마를 막 시작한 세르게이 조카의 옷 한 벌과 과자며 선물 몇 가지를 준비해 오후에 돌아왔다. 필자가 부끄럽게 내민 그것을 극구 사양하던 가족들의 순박한 눈빛은 수증기가 없어 늘 푸르디푸른 사막의 파란 하늘같기만 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진 한 장이 걸려있지 않아 물어보니 가족사진을 찍어 본적이 없다고 했다. 가족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더니, 치장하는 데만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가져간 카메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주고 맞이한 저녁식탁에는 동네에서 막 잡은 소고기 육회도 올라와 있어, 그 정성은 어젯밤 보다도 더한 것만 같았다. 민망하고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정겨움은 어머니의 솜이불처럼 긴 안식을 주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또 그렇게 하고,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리 끝에 빈 봉투에 지폐 몇 장을 넣어 게 놓은 이불 위에 슬쩍 놓고 나왔다.

신작로까지 한참을 따라 나온 가족과 일일이 작별을 하고, 기차역까지 배웅하겠다는 세르게이와 함께 300m쯤 걸어왔을까.

등 뒤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르게이의 형수가 등에 아이를 업은 채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내가 두고 온 흰 봉투를 흔들며 말이다. 영문을 모르는 세르게이는 형수에게로 달려가려는 태세였다. 놓고온 게 없으며, 기차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어서 가야한다고 세르게이의 손을 붙잡고 냅다 내달려야만 했다.

세르게이 형수와 점점 거리는 멀어졌지만 짧은 인연의 정은 더 끈끈해져만 갔다. 이렇게 나의 스물아홉 실크로드 여행은 마무리 됐다.

이듬해 늦가을 필자는 귀국을 했고, 그때 찍은 사진도 한국에 와서야 인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편 사정이 열악해 그 사진은 돌려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십이 훌쩍 넘은 24년 만인 지난 주 실크로드를 찾았다. 우르겐치와 히바에서 필자는 24년 전의 기억을 소급해보고자 무척 애써 보았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진을 지금도 내게 있다.

내게 실크로드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공인된 유적이 아닌 미완의 유물로 남아있다. 그 옛날 낙타를 탄 카라반의 흔적이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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