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7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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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유적지 수피아홀에서 광주정신 배운다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국제학박사

  • 입력날짜 : 2019. 10.10. 18:08
100년 전 광주에서 3·1운동 횃불을 가장 먼저 든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양림동이다. 양림동은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던 읍성밖 버려진 땅이었다. 일명 여우골이다. 여우가 먹이를 찾아온다던 풍장터다. 고아, 과부, 나그네, 환자가 많았던 양림동에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지었다. 그리고 변했다. 근현대 문화의 선두 주자로 서양 근대 문물이 시작됐다.

1904년 목포에서 오웬과 유진벨 선교사가 광주에 왔다. 선교사들과 같이 온 김윤수 장로 딸들이 수피아 여학교에 다녔다. 둘째 딸이 강해석과 결혼했다.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중심 세력인 강해석은 항일운동으로 서훈을 받았다. 양림동의 기독교인과 삼합양조회 소속의 청년 지식인, 그리고 숭일·수피아·농업학교 학생 그리고 독립을 열망했던 농민, 가게 점원, 대장장이, 안마사, 이발사 등 각계각층의 시민이 3월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기독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최흥종과 김윤수 집안은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람이 많다. 또 김윤수 장로와 사돈인 강호일 집안은 3·1운동부터 학생독립운동까지 5남매와 세명의 며느리(김홍은·신경애·김두채)모두 독립운동을 했고 지난 8월에 강호일의 딸 강사채와 며느리 김두채가 학생운동으로 서훈을 받았다.

최흥종 집안도 김필례 집안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사람들이 많다. 당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김윤수 장로, 강호일 선생, 최흥종 목사다.

민족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린 1919년 전국적인 만세운동은 광주에서 수피아여학교 학생과 교사가 출발점에 섰다. 수피아여학교 박애순 교사는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파리에서 열린 만국 강화회의를 설명하며 학생들도 당연히 만세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해 1월 승하한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던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로 뜻을 굳혔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거사를 하루 앞두고 학교 건물이자 기숙사였던 수피아홀 지하에 모여 고종 황제 장례식 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소매 안에 태극기를 말아 감추고 모였다. 치마저고리 차림의 학생들이 부동교로 향하면서 광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군도에 한쪽 팔을 부상당한 여학생이 피를 낭자하게 흘리고 다른 한쪽 팔로 만세를 외쳤다. 피를 많이 흘려 붙여진 별명이 윤혈녀다. ‘조선의 혈녀(血女)’로 불리는 수피아여학교 2학년 윤형숙(1900-1950) 열사다.

수피아여학교는 1919년 3월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고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학교 문을 스스로 닫았다. 학교는 해방을 맞은 1945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수피아 동문과 재학생, 교사, 지역사회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수피아여고에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청동상 기념비로 여학생 4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다. 좌대에는 학생 20명, 교사 2명, 졸업생 1명 등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을 새겼다. 하지만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다. 독립유공자 자격 기준이 많이 풀려 투옥된 사람들은 빨리 서훈을 받았으면 한다. 참, 지난해 제89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수피아 총동장회장이었던 조아라 회장이 학생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았다.

100년이 지난 지금 바로 이곳에서 ‘The1904 아카데미’ 제3기를 시작한다. 수피아여고 남구 양림동 교정에서 만나볼 수 있다. 아직 알려지지 않고 미 발굴된 인물들과 그 흔적을 찾아 광주 역사를 조명하는 일은 계속돼야 한다.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이 학생들을 통해 깨어나게 되었던 학생독립운동. 그 첫 시작도 광주였다. 3·1운동 유적지 수피아홀에서 양림정신, 광주정신을 바르게 배우고 그 정신을 잘 흘러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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