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8일(월요일)
홈 >> 기획 > 남도의 명품마을을 찾아서

[남도의 명품마을을 찾아서](8)구례 오미마을
금가락지 떨어진 ‘금환락지<金環落地>’서 인심 솟아나다
지리산둘레길·섬진강 등 풍경 빼어난 배산임수 명당터
타인능해 나눔 계승 고택체험 등 농촌관광마을 발돋움

  • 입력날짜 : 2020. 12.10. 20:39
오미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제3코스(방광-오미, 12.3㎞)가 지나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으로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구례는 택리지에 ‘3大3美’로 소개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의 고장이다. 특히 운조루가 있는 오미동(五美洞)은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터로 앞이 탁 트였음에도 북서풍을 막아주고 봇물이 흐르는 백동(白洞)이라 부르던 곳이다.

오미마을은 40가구 100여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주민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2015년 녹색농촌체험마을과 농협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돼 전국 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를 계기로 마을 영농조합법인을 결성했는데 마을의 전 가구가 참여했다. 오미마을의 농촌체험(고택탐방, 전통 한옥체험)은 주민들의 소득으로 직결되면서 자생능력이 높은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풍수지리 명당 터전

오미마을은 구례에서도 지리산 둘레길과 섬진강 그리고 넓은 들판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풍경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오미마을은 예로부터 토지가 비옥해 농사가 잘됐으며 주민들의 인심 또한 넉넉했다. 이는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시대 무라야마(村山智順)가 쓴 ‘조선의 풍수’에 이르기를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일대에 1912년께부터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곳에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진혈이 있어 길지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천운이 있어 힘들이지 않고 부귀영달할 것이라 했다. 이 세 자리는 상대(上臺), 중대(中臺), 하대(下臺)라고 하는데 이 중 하대인 오보교취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 했다.

영조 24년(1748) 삼수부사(三水府使)인 문화 류씨 류이주가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를 찾아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는 설이 있다. 오미마을의 원래 이름은 오미동(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이었으나, 운조루를 지은 류이주가 정착하면서 오미리로 부르게 됐는데 오미마을은 월명산, 지리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의 다섯 가지가 아름답다고 하여 오미(五美)라 한다.

금환락지(金環落地)의 유래가 재미있다. 토지면과 마산면 사이의 형제봉에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놀던 신선대가 있었다. 어떤 선녀가 그만 금가락지를 땅으로 떨어뜨렸는데 금가락지를 찾은 이가 아무도 없어 금가락지가 떨어진 자리를 금환락지라고 하며 지금의 토지면 오미리 앞 들판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미동려사(五美洞閭史, 1789년)를 쓴 류제양은 오미마을의 다섯가지 아름다움에 대해 첫 번째가 마을 안에 있는 오봉산의 기묘함이고, 두 번째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이 오성이 되어 길하며, 세 번째는 물과 샘이 풍부하고, 네 번째는 풍토가 질박하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로 터와 집들이 살기에 좋다 했다.

이처럼 지리적으로도 매력적인 오미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제3코스(방광·오미, 12.3㎞)가 지나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졌으며,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으로 마을 뒤편으로 형제봉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한옥마을로 형성된 오미마을(위)과 오미마을의 지리산둘레길.

◇타인능해(他人能解) 정신이 깃든 운조루

오미마을은 명당터로 운조루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으며 운조루 또한 오미마을의 길지를 찾아 터 잡고 안착한 부모와 자식같다.

풍수에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집터를 ‘진토(晉土)’라 하여 길하게 여기는데 운조루는 대문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섬진강의 서류동출과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운조루의 지기(地氣)가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남향으로 트인 집은 햇볕이 많이 들어 집의 기운을 북돋운다. 특히 뒷동산이 활처럼 굽어 있는 안쪽 중심부에 자리한 운조루는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감싸안아 장풍이 용이하다. 대문에는 호랑이뼈를 걸어둬 잡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는데 현재는 호랑이뼈 대신 말머리뼈가 걸어져 있다. 집 앞에는 연못을 파놓고 가운데에 섬을 뒀다. 이것은 관악산이 화산이라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한 비보책이었다.
1776년에 건립된 운조루는 타인능해(他人能解·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의 나눔의 정신이 깃든 고택이다.

운조루는 1776년(영조 52년)에 건립됐는데 타인능해(他人能解·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의 나눔의 정신이 깃든 고택으로 그 정신을 보존·계승하고자 유물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조선후기 귀족 주택의 건축물(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他人能解’의 문구가 새겨긴 뒤주를 보면서 배고픔을 잊게 한다. 창건주 류이주는 한 달에 한 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워놓았는데 매년 30여 가마의 쌀을 양식이 없는 이웃을 위해 내놨다. 동학혁명, 여순사건, 6·25전쟁 등 역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인능해의 상생정신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생정신은 마을 주민들의 화합으로 이어지면서 오미마을은 2008년도에 전남도 행복마을로 지정된다. 행복마을은 소나무 산책길이 조성돼 있어 침엽수림이 우거진 삼림욕장으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조선후기 부농의 민가 곡전재(穀田齊)

조선후기 부농의 민가 곡전재(穀田齊)는 1929년 건립됐는데 조선후기 부호인 박승림이 10여 년간 명당을 찾아 발견한 터에 지은 한옥으로 전형적인 살림집이다. 1940년 이교신이 매입해 그의 호를 따서 곡전재로 부르고 있다. 곡전재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집터의 환경을 금환(금가락지)의 개념을 도입해 지은 타원형의 담장이 독창적이다. 담장의 높이는 2.5m로 여순사건과 6·25동란으로 군인과 경찰이 반란군이나 부역자와 내통하고 있는 자를 색출했을 당시 곡전재의 담장이 높아 접근이 어려웠고 주민들의 피난처로 사용됐다. 현재는 안채를 제외하고는 민박으로 사용하고 있다.

1912년께부터 많은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던 오미마을은 너른 들녘이 내어주는 풍요로움과 명당터에 자리잡은 길지가 주는 믿음으로 주민들에게는 위안이 돼줬다. 현재도 오미마을은 풍수지리 명당으로 관광객들에게는 힐링과 치유의 마을이 돼 주고 있으며 귀촌하고 싶은 마을 1순위의 마을로 꼽히고 있다. 오미마을은 풍수지리 명당의 지형적 이점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타인능해의 나눔을 계승해 다양한 체험형 농촌관광마을로 발돋움하고 있다.

/정연우 자유기고가
/구례=이성구 기자


/정연우 자유기고가 /구례=이성구 기자         정연우 자유기고가 구례=이성구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