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2(금)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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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사과 같은 내 얼굴’ 중에 이 가사처럼 호박은 ‘못생긴 것’의 대명사로 쓰이지만 건강식품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2008년 6월 뉴욕타임스는 ‘당신이 먹지 않는 최고의 음식 11가지’라는 제목으로 호박과 호박씨를 집에 늘 갖춰 두고 먹을 것을 권했다. 특히 늙은호박의 노란색을 내게 하는 베타카로틴이 우리 몸에 들어가면 비타민 A로 전환돼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등 항산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주목할 점이다.
예부터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깝고 친숙하며 특별히 산모의 부기를 빼는 데 으뜸으로 여겨진 늙은호박.
시골 초가집 지붕에 노랗게 익어가고 저장력이 좋아 마루 밑 토방에 차곡차곡 쌓아둔 늙은호박의 풍경은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1980년대부터 웰빙붐을 타고 서양종 호박인 단호박이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공략하자 늙은호박으로 만든 음식은 우리 식탁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늙은호박은 단맛이 나고 구수하고 풋내가 안나. 근디 단호박은 풋내가 나. 많이 달고 약간 텁텁하고. 그래서 나는 단호박을 싫어해.”
이렇게 호불호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늙은호박의 예찬론자는 현재 목포 금화동에 살고 있는 최연당 씨이다. 보통 늙은호박으로 죽을 쒀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이 잘하는 특기가 있다.
“명절 때 우리 애그들과 손주들이 오면 안 빠져. 늙은 호박으로 식혜를 만들어. 사람들이 늙은 호박을 삶아서만 먹고 쪄서만 먹지 식혜란 걸 잘 모르더랑께. 우리 집만의 별미여. 단호박으로 하면 맛있기는 헌데, 옛날 그 맛이 안나.”
올해 일흔 일곱의 나이인 최연당 씨가 맛있게 기억하는 ‘늙은호박 식혜’를 그에게 가르쳐준 이는 놀랍게도 아버지였다.
“제가 14살 땐가 추석 때 외가인 해남에 갔는디 외숙모가 늙은호박을 주면서 ‘느그 아부지가 잘 알 것이다’ 그런 거예요. 배 타고 가지고 와서 내가 ‘아부지 뭐 만들면 좋아’ 하니까 아부지가 ‘나는 식혜 좀 해 묵고 싶다. 엿기름 있응께 따땃한 물에 딱 담가서 자루에 걸려. 찬물로 하면 덜 빠져. 넌 호박을 썰어봐라’ 우리 아부지는 호박식혜를 누구한테 배웠는지 몰라. 옛날부터 우리는 이것을 잘해 묵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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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말로 자상하게 훈수를 두면서 딸에게 음식을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 4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어릴 적에 목포로 유학와서 정미소를 하며 잘 살았던 큰고모와 살았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큰고모로부터 어깨너머로 배우고 미각이 남달라서 그런지 아버지가 요리를 잘한 것 같다고 그는 추측한다.
신문기자, 중대장 등 여러 일을 했던 아버지는 목포에서 터를 잡았기 때문에 그가 6살 때 가족은 고향 해남에서 목포 금화동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 이 집 본체는 하꼬방(판자촌) 하나였당께. 그때는 한 대여섯 평이나 될까. 6살 때 이 골목에 들어올 때 엄청 좁았어. 옛날에 물동이를 양쪽으로 지고 집에 오믄 바로 못 가고 옆으로 해서 가야 했어.”
금화동은 아래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경사진 면에 낙후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난한 달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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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을 간직한 이곳의 근처는 영화 1987년 촬영지인 ‘연희네 슈퍼’가 있어서 관광객들이 찾는다. 목포 개항 이후, 이곳은 일제시대 일본인의 유곽이 많아서 ‘사쿠라마치’라고 불렸다. 2014년 목포문화원에서 출간한 ‘목포의 땅이름’에 의하면 목포항의 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됐는데 1914년 앵정(櫻町)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동명변경으로 금화동으로 고쳤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 사람들은 바다가 있어도 배로 고기 잡는 것이 아니라 중선배들이 잡아온 고기들을 어판장에서 선별하는 일로 돈벌이를 했다.
봄에는 장어, 간재미, 병어, 여름에는 쥐치, 가을에는 오징어, 갈치, 겨울에는 갑오징어 등 철따라 나는 생선들이 많았다.
21살에 결혼한 최연당 씨는 남편과 함께 생선을 담는 궤짝을 짰는데, 수작업으로 할 때는 하루에 300개 이상, 기계로 할 때는 하루에 900개 이상을 팔아 자식들을 가르치고 살림을 꾸려갔다.
해안가 마을에 사는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옛날에 물이 귀해 동목포역까지 1시간 넘게 걸어서 식수를 길러 왔고 곡식을 해먹을 논밭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지형상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은 유달산 자락에 있어서 거의 바위로 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동네 어귀를 지나 좁은 골목길에 있는 그의 집 대문에 들어서자 시선을 확 끄는 것이 있었다. 집 안에 커다란 기암괴석이 솟아있고 이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왼쪽은 주거 공간, 오른쪽은 다용도 공간으로 지어졌다. 마당도 없이 협소하고 천장이 낮은 이 집에서 특히 다용도 공간에는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어 집 구조가 기이했다. 큰 바위에 기대어 만든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코딱지만 한 옥상이 있다. 화분과 장독이 있고 생선 말리는 건조장이 있는 옥상은 시멘트 바닥으로 돼 있는데, 과거에는 텃밭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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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돌을 깨서 텃밭을 만들었제. 또 나무판자를 주셔다가 짜갔고 흙 퍼담아서 호박 심었지, 솔, 배추 심었지. 옛날에는 거름도 없어. 땅에 심어 놓고 연탄재 펴다 담고 불 때다가 남은 재를 줘서 야채는 다 해 묵었어. 얼마나 잘 된다고. 나중에 옥상에 물이 새니까 안 하고 치운 거제.”
그렇게 고육지책으로 집에서 길러 먹었던 채소가 늙은호박이었고 이것은 척박한 토양에서 농약도 할 필요 없이 잘 자라서 가난했던 금화동 사람들에게 끼니를 해결해주는 구황작물이었다.
2011년 농촌진흥청에서 발간한 ‘호박과 사랑에 빠지다’에서는 늙은호박이 국내에서 오랜 기간 토종으로 재배됐고 ‘맷돌호박’ 또는 ‘청둥호박’이라고도 하며 과실의 형태, 색깔, 기타 특성들이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최 씨는 화분에 늙은호박 씨를 심어 늦가을에 수확해 저장해 두고 별미를 해먹고 있다. 돌아가신 엄마가 목포에서 생선 장사를 한지라 살림을 돌볼 여력이 없어 그는 9살 때부터 엄마 자리를 대신해 요리를 하고 제사음식을 차릴 정도로 손끝이 야무졌다.
이는 그의 말마따나 못 하는 음식이 없이 별것을 다 잘했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의 친엄마도, 시어머니도 몰랐다는 늙은호박 식혜를 만들어본다. 먼저 늙은호박의 껍질을 벗기기.
과거 그의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호박을 통째로 득득 긁어 껍질을 벗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칼로 조각을 내어 필러로 깎는다. 엿기름을 뜨뜻한 물에 잠시 담가뒀다가 망에 담아 뽀얀 물이 나오도록 걸러 낸 후, 찹쌀로 찐 고두밥을 섞어 보온 밥솥에 삭힌다. 밥알이 동동 뜨면 식혜가 제대로 된 것이다.
호박을 삶을 때 더 맛을 내기 위해 엿기름물을 사용하는 것이 키포인트. 푹 삶은 호박을 믹서기로 곱게 갈아 식혜와 혼합한 후, 설탕을 조금 넣고 센 불에서 약 30분 정도 저어가면서 끓이면 늙은호박 식혜 완성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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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곁들어 먹을 늙은호박 떡도 빠질 수 없다.
호박을 채 썰어 설탕을 뿌리고 멥쌀가루를 섞은 후, 시루에 깐 면포 위에 올리고 소금 넣어 삶은 팥을 골고루 펴서 올린다. 이렇게 켜켜이 쌓아 50분 정도 센 불에서 익히면 맛있는 호박떡 냄새가 온 집에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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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구름 같은 하얀 밥알과 달빛 같은 노란색이 어울린 늙은호박 식혜를 보자, 색깔에 홀딱 반한다. 이어 코끝에 닿는 은은한 호박 향이 혀를 유혹한다. 수수한 단맛에 입 안은 사르르 녹고 뒷맛은 깔끔하다. 여기에 주홍빛 호박이 촘촘히 박혀 있는 포슬포슬한 떡은 약간 달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구수한 팥과 잘 어울려 혼자 먹기에 아까울 정도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좋고 건강에 이로운 영양덩어리, 늙은호박을 어릴 때부터 늙도록 함께해온 최연당 씨.
흙 한 줌이 귀한 목포에서 길러낸 늙은호박에는 정 많은 아버지의 손맛이 배어있고 예나 지금이나 색향미로 선사하는 감동의 맛에는 그리운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가슴 속에 넝쿨째 굴러온다.
<남도밥상탐험대=최지영·남정자·박기순·조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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