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려인마을은 을사년 새해를 맞아 세계 각국의 고려인 동포 모두의 행복을 소원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20일 열린 ‘제12회 광주 고려인의 날’ 행사. <고려인마을 제공>

"갑진년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교회에서 주민들이 함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고려인 집성촌 중 하나가 위치한 광주 광산구 월곡동. 20여년 전 이곳에 소수의 고려인이 모여 살기 시작하며 형성된 공동체의 크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면서 ‘고려인마을’이 됐다.

강제이주 된 중앙아시아에서 척박한 황무지를 옥토로 일궜던 선조들의 의지를 이어받은 후손들은 문화와 풍습이 사뭇 다른 이 땅에서 고려인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며 도약을 위한 도전에 다방면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마을 구성원 대부분 법적으로 비자에 발목이 잡히는 외국인인 탓에 완전한 정착까진 갈 길이 멀다. 또 지역사회와 융화되고 있긴 하나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서로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에 본보는 을사년 한 해 동안 고려인마을을 집중 조명하며 이들이 우리 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한 식구가 되기까지 풀어야 할 과제 등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을사년 소망 “더 나은 공동체”

“광주 고려인마을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고려인 동포 모두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소원합니다.”

갑진년(甲辰年)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교회에서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린 고려인마을 주민들은 새해 소망에 대해 이 같이 입을 모았다.

이날 오후 10시에 열린 갑진년 마지막 ‘공동체 모임’에는 고려인마을 지도자와 주민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설교 전 반주에 맞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송년의 밤을 함께 보냈다.

고려인마을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이천영 목사는 성경의 누가복음 6장 38절에 빗대 고려인 공동체의 앞날이 지금 당장 녹록지 않을지라도 구성원 서로 믿고 의지하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방법에 대해 고려인마을 주민들은 공동체 설립 기원인 ‘상부상조’ 정신의 유지와 확산을 꼽았다.

◇돕고 살자는 마음, 마을로 발전

고려인마을은 흩어져 살던 고려인 동포들이 하나둘씩 광산구 월곡동으로 모이면서 태동했는데, 그 중심에는 이천영 목사와 신조야 대표가 있다.

고려인 3세인 신 대표는 2000년대 초반 국제결혼을 한 딸을 만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조상의 땅 한국에 새롭게 보금자리를 틀었다.

생활 환경이 바뀌면서 자신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 대표는 주위 동포들의 임금 체불 문제와 민원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외국인 근로자를 돕던 이 목사를 만났고 2005년 고려인 30여 가정이 모인 공동체 ‘고려인마을’을 함께 꾸렸다.

이와 함께 이 목사와 신 대표는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도움을 넘어 지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본격 시작했다. 이 일환으로 만들어진 게 각종 민원 해결 창구인 상담소와 자녀들을 위한 어린이집, 협동조합 등이다.

이러한 시설이 잇따라 들어섬에 따라 마을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지난 2022년 12월 법무부가 발표한 출입국 자료 ‘고려인 500명 이상 거주 도시’에 의하면 광산구 내 고려인은 4천753명으로 파악됐으나, 현재 고려인마을은 주민 수가 이미 7천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피난민 800여명 무사 입국 ‘이목’

규모와 함께 마을의 위상도 설립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여러 이유 중 세간의 주목을 가장 크게 받았던 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살 곳을 잃어버린 피난민 876명을 조상의 땅으로 무사히 대피시켰던 것이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고려인마을은 현지에 있는 가족·친구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고려인마을 구성원들은 물론 지역사회 각계각층에서 참여한 덕에 상당한 금액이 모였고, 이 돈은 고려인 동포들이 전쟁의 화마를 피하도록 항공권 구매에 사용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에 도착한 손녀 남아니따(오른쪽)양과 남루이자씨의 재회 모습.

그 덕에 고려인마을 주민 남루이자씨의 손녀 남아니따양이 한국에 들어와 가족과 재회하는 등 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감격적인 상봉이 이어졌다. 또 항공권 지원으로 한국에 들어온 김레브씨의 막내아들 김비탈리씨가 아버지와 함께 광주에 살기로 한 것처럼 피난민 일부가 공동체에 합류하면서 고려인마을은 뜻하지 않게 부흥기를 맞았다.

◇관광객 천만시대를 향해 발걸음

다만, 공동체가 함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먹거리가 부족하다는 고질적 문제의 해결은 아직 요원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고려인마을은 ‘역사마을 1번지’라는 특색을 살려 ‘관광객 천만시대’를 열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자는 청사진을 내놨다.

지난해 9월부터 정식 운영에 돌입한 ‘고려인마을 골목여행’이 바로 그 산물이다.

광산구와 고려인마을이 함께 추진한 ‘골목여행’은 강제이주, 항일운동, 옛 소비에트연방(소련) 해체·귀환, 이주민 사회 형성 등 고려인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자산을 활용한 체험 상품으로, 운영을 시작한 지 약 3개월 만에 이용자가 1천800여명을 돌파했다.

이 밖에도 광산구가 ‘중앙아시아 역사테마 관광지구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골목여행과 함께 ▲고려인 전통음식 쿠킹클래스(요리교실) ▲고려인마을 문화장터&버스킹(거리공연) ▲마을교재 활용 청소년 고려인마을 역사문화탐방 등 새로운 프로그램을 대거 선보이면서 고려인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고 그 덕에 상권도 이전보다 활성화됐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먹거리 문제의 완전한 해결까진 아직 갈 길이 멀어 고려인마을은 새해를 맞아 관광 상품의 고도화와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천영 목사는 “일자리 창출 등 고려인마을 생존 기반 조성을 위한 목표가 많다”며 “세계적인 거장 문빅토르 화가의 미술관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인데, 많은 관광객들에게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신조야 대표는 신년사를 통해 “고려인마을이 문화와 복지의 중심지로서 더 큰 도약을 이루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문화와 역사 자원을 활용한 관광 활성화로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관광객 천만 시대를 향한 발걸음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안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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