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2(일)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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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과’는 옛날에 불렀던 수박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화폭에서 수박은 우리가 여름에 즐겨 먹는 검은 줄무늬가 있지 않다. 무늬가 없는 청수박을 보면서 연상되는 수박이 있는가? 바로 광주 무등산수박이다.
초록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수박과 무등산수박은 모두 박과에 속하지만 구별되는 점이 있다. 무등산수박은 민무늬 청록색으로 옛날에는 ‘푸랭이’라고 불렸다. 육종된 신품종 수박의 씨앗은 까만색이지만 무등산 수박씨는 설익은 듯 빛깔이 희거나 머리 부분의 양쪽 눈만이 검고 또는 노르스름하면서 테두리가 검다. 무등산수박은 뜨거운 여름에 생산되지 않고 8월 중순쯤 가을바람과 함께 등장한다. 줄무늬 수박에 비해 품종 개량은 되지 않았다. 한때 학계에서 교배를 통해 품종 개량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품질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무등산수박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등산에서만 생육하며 개량되지 않은 고유의 특성을 지닌 씨앗을 물려주고 또 물려주면서 오랜 세월 동안 뿌리내려온 특이한 품종이다. 무등산수박은 15~30㎏으로 신품종보다 더 무겁고 때로는 100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고가이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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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펴낸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자원총람」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있다.
“무등산에서 수박을 재배하기 시작한 유래를 상고할만한 문헌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허균의 ‘도문대작’,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한결같이 고려 때에 원나라 앞잡이 노릇을 한 홍다구(洪茶丘, 1244-1291)가 들여와 개성에 심었다고 적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광주 무등산수박의 전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홍다구가 삼별초 군사를 치러 무등산에 왔을 때에 씨를 심어 수박이 퍼졌다는 이들도 있다. 무등산수박이 조선시대 지방 특산물로 임금님께 진상됐는가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이렇게 문헌상 근거는 부족하나 무등산수박은 예나 지금이나 광주의 명품으로서 위상을 자랑한다.
무등산수박의 씨앗을 대대로 지켜가며 고집스럽게 재배하고 있어 오늘날 ‘수박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광주시 북구 금곡동 금곡마을이다. 쇠 금(金), 골짜기 곡(谷) 자를 쓰는 금곡마을은 무등산 동북쪽 자락에 자리하는데 이곳에서 쇠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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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이었던 금곡동은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예전에 서림마을로 불렸다.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는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서림촌’이 나타난다. 석저면 서림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석곡면 금곡리에 속하게 됐고, 1955년 담양군 남면에 편입됐다가 광주 석곡동으로 옮겨져 오늘날에 이른다.
이곳에 지석묘(고인돌)가 출토돼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전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500년 전, 남평 문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으며 다른 성씨에 비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 남평 문씨의 4대 손부(孫婦) 신안심 씨가 ‘무등산수박장아찌’라는 향토음식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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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3살 때 금곡마을 토박이인 남편을 만나 당시 100호 정도 사는 서림마을로 시집왔다. 무등산에서 고사리, 취 등 산나물을 캐서 팔거나 논밭 농사를 짓고 살았었는데, 1991년에는 수박 농사를 새롭게 시도하게 됐다.
무등산수박은 효자작목이 됐고 지금은 그의 아들이 30년 넘게 가업을 잇고 있다. 마을에서는 최대 20여 농가가 무등산수박 재배에 뛰어들어 부농을 꿈꿨는데, 수박 농사가 고된 노동이기에 농가의 수는 점차 줄어서 9개 농가만 남았다. 판매는 마을 입구 무등산수박공동직판장에서 방문 또는 주문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렇게 무등산수박은 수확 후 판매가 전부였다.
“그 전에 수박 껍질은 밭에다 거름으로 다 버렸제.”
그런데 한때 흑염소 식당을 했던 신안심 씨는 손님들을 위한 반찬으로 쓸모없이 버려진 무등산수박 껍질에 눈을 떴다. 무등산수박의 두꺼운 과피를 장아찌로 탈바꿈시킨 것인데, 음식 솜씨가 좋았던 시어머니가 잘 만들어 주셨던 고추, 고춧잎 등 장아찌에서 착안한 것이다.
무등산수박장아찌를 처음 선보였을 때, 한 접시를 싹 비울 정도로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금곡마을의 토산물인 무등산수박이 장아찌와 접목해 20년 넘게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비싼 수박잉께 많이 못 만들고 못쓴 수박으로 장아찌를 담아.”
올해 8월 중순쯤 애정의 결실로 수확한 무등산수박은 어른 두 팔로 안을 정도의 크기로 탐스럽다. 무등산수박은 결 따라 중심부에서 가로로 잘라야 속살이 바스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살짝 칼을 대자 가볍게 갈라지며 특유의 상큼한 향이 확~올라온다. 이때가 제대로 익은 것이라고 한다. 속살이 옅은 선홍색인 무등산수박은 그 맛이 신품종 수박보다 덜 달고 식감은 사근사근하다. 무엇보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과즙과 그 부드러움은 특별한 맛으로 남는다.
이 무등산수박 하나를 얻기까지의 과정은 만만하지 않다. 지금은 모종으로 노지나 하우스 재배를 하지만 과거의 재배법은 사뭇 달랐다. 평지가 아닌 해발 300m 이상 무등산 기슭에서 삽 한 자루 길이로 깊게, 삽 한 자루 넓이로 구덩이를 여기저기 판다. 퇴비를 흙과 섞어 구덩이에 넣고 3-4개 씨앗을 심어 흙으로 덮어놓는다. 발아된 순이 1m쯤 자랄 때 자르면 여러 순이 나오는데 하나의 순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꺾어버린다. 파종한 지 한 달이 되면 노랑 수꽃이 핀 후 암꽃이 이어서 피는데 수꽃을 따서 일일이 암꽃에 문질러서 수정시킨다. 어른 주먹만 한 수박들이 달리면 한 넝쿨에 1개만 엄선해 잘 키운다. 세심한 정성과 함께 땀방울을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기후 좋고 땅심 좋은 무등산의 적당한 햇빛과 비가 동반될 때 수박이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다.
“무등산수박은 약해. 크는 과정에서 많이 죽어부러. 딸 것인지 못 딸 것인지 딸 때까지 몰라.”
보통 5월에 파종해 석 달에 걸쳐 농부의 땀과 노력만이 아닌 하늘의 도움까지 있어야 값진 무등산수박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귀한 무등산수박을 달콤하게 맛보고 껍질은 장아찌로 활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연한 껍질을 벗긴 다음, 굵은 소금을 뿌려 하룻밤을 재우고 건져서 햇빛에 하루 정도 말린다. 이제 장아찌 소스를 만들 차례. 진간장과 맛의 변질을 막아주는 소주를 3대1 비율로 해서 생강을 많이 넣고 팔팔 끓인다. 이 장아찌 소스를 식힌 후 껍질에 부어 저온 저장고에 두고 절인다. 5-10일 후 용기의 뚜껑을 열면 하얀 이물질이 생길 수 있는데 이를 걷어내고 다시 끓여서 식힌 소스를 부어 넣는다. 간이 배어들수록 껍질의 수분이 빠지며 싱거워지는 까닭에 시차를 두고 대여섯 번에 걸쳐 장아찌 소스를 새로 끓여 붓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렇게 절이는 과정에서 꼼꼼하게 소스를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툼한 두께가 줄어들고 옅은 연두색이 검정색으로 변하기까지 제대로 숙성하려면 1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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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절인 무등산수박껍질은 짜기 때문에 먹기 좋게 썬 다음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씻어낸다. 물기를 꽉 짠 후, 고춧가루, 쫑쫑 썬 쪽파, 다진 마늘, 통깨, 조청으로 넣어 양념한다. 조물조물 무쳐서 홍고추를 썰어 고명으로 올리면 무등산수박장아찌 완성.
한입 맛보면 짭조름하면서 생강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고소함이 톡 터진다. 약간 단 듯하면서 상큼한 수박껍질을 장아찌로 먹을 때는 ‘아삭 아삭~’ 씹히는 소리가 맛있고 경쾌하다. 따끈한 밥에 얹어서 먹으면 간도 딱 맞아 한번 먹고 또 먹고 싶은 밥반찬이다.
무등산 흙에서 이슬과 바람, 햇빛을 먹고 자라며 남다른 정성으로 키우는 무등산수박. 강렬하지 않지만 수수한 천혜의 단맛으로 사랑받고 있는데 여기에 머물지 않고 버려지는 껍질을 장아찌로 담가 많은 이들의 입맛을 돋워내는 그의 생활 속 지혜가 빛난다.
<남도밥상탐험대=최지영·남정자·박기순·조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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