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연착으로 연결편을 놓치는 바람에 항공사가 제공한 호텔 셔틀버스에 올랐다. 미니애폴리스의 산하가 처음임에도 천 번 이상을 왕복한 광주-서울 간 고속도로인양 전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래서 여행은 젊어서 하라고 하나보다라고 생각하며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나니 밤 8시가 넘어 서둘러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근처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았기에 지나가는 젊은 친구에게 물어 조금 떨어진 햄버거집 정보를 얻었다. 덕분에 자유로운 공기를 만끽하며 어두워가는 이국의 낯선 길 위를 걸을 수 있었다.

20여분을 걸어 겨우 찾은 햄버거집에 들어서려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다른 곳을 찾을 요량으로 이동하는데, 어떤 사람이 드라이브 쓰루에서 햄버거를 주문하고 있었다. 그 차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 자기한테서 주문하라는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주문 후 픽업 창구로 갔더니 원하면 매장 안으로 들어와서 먹으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햄버거 세트를 받아드니 책임자처럼 보이는 직원이 나와 농담을 건넸다. 주문 창구 근처에 웬 틴에이져(십대)가 어슬렁거리고 있어서, 걱정돼 닫은 문을 특별히 열어주었단다. 나도 웃으며 한 마디 건넸다. 실은 내가 미래에서 온 타임 트래블러, 시간 여행자라고. 작은 체구에 캐주얼한 복장을 한 동양인이 어둠에 깔린 감시카메라 안에서는 정말 10대로 보였을까? 집사람에게 당신은 뒤프로디테(뒤에서 보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나는 뒷모대엘(뒷 모습 보면 대학생 모델)이라며 서로 웃곤 했는데, 나에게 그러한 농담을 하는 사람을 먼 이국땅에서 만나 잠시 유쾌하게 웃었다.

다음날 먼동이 터오르는 신새벽에 공항으로 가는 셔틀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승객과 인사를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피아노 강사였는데 지금은 군에서 코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그리 다른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피아노를 가르칠 때나 코딩을 할 때나 종일 앉아서 자판 두드리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집수리를 하러 온 사람이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던 기억이 난다. 예술 분야 전공자들은 늘 과잉공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연예인 전체 소득의 85% 가량을 상위 10%가 가져간다고 한다. 나머지 90%의 사람들의 소득은 기초생활수급자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녀가 연예인이 되겠다는 것은 90% 확률로 생보자가 되겠다는 것이라는 농담이 생겨났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길 위에서 만난 피아니스트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나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아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었다. 1인당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의 벽지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나처럼 어릴 적 사진 한 장 없을 정도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눈앞의 현실을 꿈으로 바꾸며 살아가야 했던 고통의 시절이 지나고,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꿈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꿈길의 끝은 여전히 어둡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로지도의 핵심은 꿈을 좇아 노력하도록 이끄는 것만이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꿈꾸는 일이 생계유지에 필요한 직업이 될 수 없을 때 무엇을 해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릴 것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나이 먹은 여행자의 길 위에도 종종 새로운 만남,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다. 나이 들어 여행을 하면 가슴이 아니라 다리만 떨린다던데, 운 좋으면 아직은 가슴 뛰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억에서 사라진 아득한 과거를 만나기도 하고, 내가 떠나고 없을 먼 미래를 만나기도 한다. 무지개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한, 우리는 낯선 길 위를 여행하는 영원한 시간 여행자임을 이번 출장길 위에서 다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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