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6(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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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세월동안 향기 없는 꽃만 피워낸 나의 펜, 누군가의 심장을 관통할 수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오늘도 그 물음은 유효하다. 30년, 서른 잔치는 정말 끝난 것인가.
두 번째 서른 휘슬이 울리기 전, 달려온 서른의 트랙을 떠올리면 그리운 이름들이 많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최영미 ‘선운산에서’)라는 시가 먼저 가슴을 다그친다.
그 당시 경향신문, 한겨레 발로 시작된 섹션 경쟁이 여름 땡볕만큼 뜨거웠다. 섹션 면의 대유행, 편집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제목과의 사투, 그 한 줄의 카피와 커피 두서너 잔을 바꾸어야만 했다. IMF를 앞둔 암울했던 시기였지만 돌이켜보면 아픔만큼 성숙했고 치열했던 만큼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았다.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 볼품없는 몸뚱이, 쟁여진 햇빛과 절여진 비바람부터 잘라냈다/ 쌍날 대패로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겨낸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 허물을 벗는 것일까/ 주목받지 못한 세월의 생채기가 옹이로 박혀 있다/ 바위를 쪼아 새 부리를 얻는 솔개처럼/ 나로 살기 생존법을 배우려면/ 기꺼이 쓸모없는 살쯤 도려내야 한다./ 뜯겨나간 살점엔 삼 겹으로 포장된 게으름이 내재되어 있다/ 내밀한 곳까지 칼끝이 가 닿아/ 켜켜이 수록된 생의 이력이 엘피판으로 드러나고/ 까칠한 성품을 구슬리는 건 사포의 몫이다/ 움푹 팬 배꼽 주위를 들어내 공명을 불어 넣는다/ 튕기면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날아가는/ 이것은, 언젠가 지친 심신을 다독이는 위안이 될 것이다/ 속내 단단해져 무게 가벼워지라고/ 또드락또드락 주문을 거는 사내/ 해말간 웃음 툭 툭 찍어 발라 생기를 제 몸에 두르고/ 여백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줄 좌우명 하나 새겨 넣는다/ 두들기거나 타거나 열고 닫아야 온전해지는, 나는/ 누군가의 손을 기다려 소리를 품은 악기로 비로소 환생한다. (졸작)
두 번째 서른, 다시 악기로 태어날까 싶다. 누군가의 심장을 관통할 수 없다면 악기가 되어 울림을 주고 싶다.
김원욱, 남성숙, 이재창, 박준수 등등 그리운 이름들이 동백꽃처럼 진다. 동백꽃은 땅에 떨어져 더 붉게 핀다는 걸 그들은 알까.
누군가와 한 끼를 나누기에도 버거운 저녁, 기꺼이 혼밥의 편에 선다. 라면이 끼니가 될 때 눈물겹다. 오늘 하루도 수고한 나에게 캔 맥주 한 잔, 내일도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 혹은 주문이다.
그래도 땀에 절여 눅눅해진 등짝 들러 붙이라고 살붙이가 되어주는 선풍기, 저 선한 바람엔 눈물보다 짠 웃음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위안의 힘이 있다. 어쩌면 밥은 우리들에게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슴에 그리움을 오래 담아두면 김칫독처럼 삭아서 사각사각한 향 우러나는 것일까. 나이 들수록 헤퍼지는 내 그리움에도 향기라는 게 있다면 향유고래의 배설물 같을 게다.
이것은 일렁얄랑 떠다니다 말라서 소금기만을 남겨,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있다.
상처 많은 꽃이 더 향기롭듯 향은 특정한 추억을 품는다. 상처가 없으면 추억도 없어 세상은 추억하는 만큼 아름답다. 지나온 30년도 다르지 않다.
세상은 추억하는 만큼 아름답다/ 추억이 없으면 상처도 없어/ 시인으로 늙고 싶은 아버지의 봄은 오지 않는다/ 주목받지 못한 생의 채널을 돌려가며/ 삐걱거리는 기억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오선지에 못다 한 이야기를 음표로 새겨 넣는다/ 부끄러운 역사를 노래에 담겠다는 꿈은/ 정들만 하면 굽이 닳아 헌신짝 취급받는 구두보다/ 유통기한이 짧아 번번이 폐기된다/
짜고 매운 일상에 점점 주눅 들어 가는 아버지/ 남이 만든 답을 찾아 평생 남의 생각만 읽어/ 헛배 부른 뇌의 항아리를 들여다본다/ 눈먼 불도저로 살아온 젊은 날도/ 묵은 지처럼 곰삭은 지 오래다/ 소리로 넘쳐나는 디지털시대를 관통하는 아버지가/ 난청에 시달리는 건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를 세상이 들어주지 않아서다/
서툴러 정겹고 투박해서 눈물 나는 악보를 들추면/ 색맹 검사지 같이 절묘한 노랫말 사이로/ 목발 짚고 건너온 아픈 현대사가 보인다/ 누군가 베이지 않고 다치지 않게/ 양날의 카르마인 독을 다시 덮는다/ 그래도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지란 이름으로 칼보다 강하다는 펜을 고발한다 (졸작2)
그렇다. 30년은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바꾸어 놓았다. 오래 동안 열어보지 않은 사진첩을 넘기는 느낌. 한 장 한 장 사진첩을 넘길 때마다 나는 어미 품(친정)이 그리워 귀소본능으로 헤엄쳐가는 연어다.
어미 품에 당도하면, 30년을 한 결 같이 당산나무처럼 비바람을 견뎌냈을 그 이름-광주매일신문-을 뜨겁게 끌어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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