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수만명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 당했다. 이들 대다수는 카자흐스탄에 정착했고, 나머지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아픈 역사 속에서 이들의 흔적은 지워졌고, 그나마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고려인의 강제 이주 역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에 취재진(광주매일신문·광남일보)은 강제 이주 당시 기착지인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를 찾아 고려인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겼고, 그들의 희생과 아픔을 기억하기 위한 후손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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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역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수만명의 고려인이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강제이주될 때 거쳐간 서글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설움의 역사 시작…크질오르다역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는 1937년 강제이주 초기 가장 많은 수의 고려인이 이주한 곳이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은 9만5천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크질오르다를 비롯해 알마티, 카라간다, 심켄트 등 15개 도시로 분산됐다.

이중 3만5천여명의 고려인이 이주한 크질오르다는 초기 정착과정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고려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한인사회 건설에 매진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우리 민족의 지난 역사를 증언해 주는 장소 등이 작지만 제대로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의 서글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 중 하나가 크질오르다역이다.

크질오르다역 입구.

크질오르다역은 1937년 10월 러시아 연해주에 살고 있던 17만여명의 고려인이 이유도 모른 채 화물기차에 태워져 강제이주될 당시 거쳐 간 기차역 중 하나다.

당시 정거장만 있는 황량한 대지에 고려인들은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고려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크질오르다 역사는 당시의 설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아직도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역사 건물 주변에는 구인·구직 광고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고, 기차역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나 좀처럼 행인을 찾기 어려워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10여개의 철도 라인에는 여객보다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열차들만 길게 늘어서 있어 이따금 화물열차의 통과를 알리는 안내방송 소리만 이곳이 기차역임을 일깨웠다.

고려인들의 슬픔을 머금은 역사적 장소이지만 건물 주변 어느 곳에서도 당시의 아픔을 기억할만한 안내판 하나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고려인3세 아크슴바(21·여)씨는 “크질오르다 지역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첫 발을 디딘 곳이라는 생각에 가슴 뭉클하다”며 “추위와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모진 학대와 고생을 이겨낸 고려인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고난의 삶 고려인 선조 발자취…무관심 속 방치 ‘아쉬움’

고려인들은 메마르고 척박한 이역만리 땅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역경을 이겨내기 시작했다.

특히 크질오르다 지역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애국지사들이 다양한 활약을 펼친 곳으로, 이를 기리기 위한 장소가 시내 곳곳에 위치해 있다.

계봉우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명명한 ‘계봉우 거리’도 이 중 하나다.

계봉우는 한글학자이자 역사가로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독립운동의 혼을 불어넣었고 크질오르다로 이주해 한글로 교재를 만들고 교육시킨 인물이다.

그 또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이곳에서 고려인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1999년 7월 당시 박베르겐 도스만베토프 크질오르다 시장·계봉우 유족·고려인협회의가 협의해 조성됐고, 길이는 약 2㎞에 이른다.

하지만 ‘계봉우 거리 23번지(23 Korshesi Ge Bon U)’에 위치한 제9호 구역 거리위원회 건물에만 ‘계봉우 거리’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고, 다른 주택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북간도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계봉우 선생은 강제이주된 크질오르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공로를 기억하고자 크질오르다엔 ‘계봉우 거리’(사진 上)가 조성됐으며, 유해는 한국으로 봉환됐지만 묘역이 남아있다.

크질오르다에는 홍범도 거리, 홍범도 묘터를 비롯해 계봉우·최봉설 선생 거주지 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으나 문패를 제외하곤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었다.

그들의 정신과 희생을 이어가기 위해 조성된 기념적인 장소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는 현실에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김 알릴루예바(64·여)씨는 “고려인의 애환을 비롯해 국외 항일투사들의 사적지와 사료들이 크질오르다 곳곳에 남아있지만 모두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며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추모공원 조성, 역사관 건립 등 한국 정부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안재영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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