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5(화)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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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잠이 들어버리므로 간밤의 달빛은 거실 침상을 비추고 필자의 잠든 얼굴을 어루만졌을지도 모른다.
새벽에는 바깥세상에 대해 무엇보다 귀가 먼저 반응한다. 수탉은 이제 우는 것조차 지쳤는지 소리마저 갈라져서 매력이 없다. 하지만 가까운 동쪽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으니, 그 소리에 귀가 열려 문득 눈을 뜰 수밖에 없게 된다. 뻐꾹새 울음소리는 그래서 독거자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만큼 도시의 자명종 소리는 이곳에선 쓸모가 없다. 여름 새벽은 수탉보다 뻐꾹새 소리가 더 청아하고 간절해서 그 소리를 귀에 담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코다. 산중에 여인이 찾아올 리 없지만 느닷없는 분내와 고혹적인 향수 냄새가 들어온다.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눕게 만드는 이 이국적인 향은 치자꽃이다. 세계적인 여성 재즈 보컬로 불리는 흑인 가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1915-1959)를 떠올리게 하는 슬픈 향이다. 속으로 장마가 멀지 않았구나,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치자꽃은 장마가 시작될 무렵 피어서 장마가 끝나갈 때쯤 진다고 했으므로 이 무더위도 잠시 수그러질 때가 오겠거니 여긴다.
밖으로 나오면 곧장 집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마당 한쪽에는 덩굴장미가 더 번성해서 아침 마당을 숨막히게 한다. 백합은 머잖아 터질 것 같고 옥잠화는 시간이 더 남은 것 같다. 보리수 열매는 이웃의 손길이 닿아 남은 게 없고 드문드문 버티고 있는 몇 알은 산새들의 요깃거리가 될 것이다.
뒷마당으로 내려서면 가지 2 모종, 고추 4 모종, 오이 3 모종이 나란히 있다. 이 녀석들은 주인의 게으름 때문에 물을 제때 받지 못해서 키가 작고 한결같이 억울한 표정이다. 그동안 이웃들이 밭 주인 흉을 봤을 것인데, 주인은 고사하고 이 녀석들이 감내했을 수치와 수모를 생각하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마늘, 양파 수확한 자리에는 콩을 심었지만 아직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작물들 앞에 사직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상추만은 잘 자라서 지난주에 도시의 몇 명 벗들에게 인심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게 안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나 유심히 살펴보다가 움푹 팬 두 곳이 수상쩍어 생각해보니, 그 녀석의 소행인 것을 알았다. 메론아이스크림 반 토막 크기의 홈, 고라니가 다녀간 것이다. 무성하던 잎은 하나도 없고 상추대마저 뜯어 먹은 잇자국이 선명해서 놀랐다. 밤마다 산속에서 꺽∼꺽 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민가의 양식을 탐내는 걸 보면 교미의 절정기에 이른 것이 틀림없다. 독거자의 양식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웃의 밭은 식구가 많아 깊은 밤마다 주인이 랜턴을 들고 둘러보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집 옥수수밭은 피해야 할 듯싶다.
이글거리는 해가 모후산의 어깻죽지를 짓누르며 올라온다. 노출된 얼굴이 익기 전에 서둘러 거실로 돌아와 밀린 설거지를 마치면 어제의 혼미한 정신이 조금 개운해진다. 거실 침상의 이불은 주인의 심성을 닮았다. 정돈되지 않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불을 둘둘 말아 큰 베개로 삼고 창밖을 본다. 밖은 초록의 일색이다. 이럴 땐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에 이상(1910-1937)이 있어서 그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한여름에는 이상의 「권태」를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러므로 「권태」는 필자에게 최대한의 권태를 즐기고 누리게끔 만든다.
…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忙殺)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권태」, (1937.조선일보).
권태의 계절이 왔다. 한여름에 권태를 즐기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느 계절에 참다운 자신을 만나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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