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현 작가의 작업은 ‘역사’와 ‘일상’을 바탕으로 잊혀진 기억을 담아내는 일이다. 사진은 지난 2일 월산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세현 작가.

“모든 역사는 일상에서부터 출발해요. ‘작가의 개입’을 통해 사건의 어떤 지점이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거죠. 꾸준한 작업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내는 지금이 정말 행복해요.”

‘역사’와 ‘일상’은 이세현 사진작가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지난 2일 월산동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전국 곳곳을 누비며 의미있는 ‘역사적 장소’를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그의 작업은 특정한 상징물을 통해 그 장소에서 벌어진 일을 유추하게 한다.

6·25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강원도 양구 펀치볼 지역에서 담아낸 작품 ‘Boundary-punchbowl’

그중 역사적 장소를 배경으로 ‘돌’을 던지는 행위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그의 ‘Boundary’ 연작은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2010년 당시 대학 시절 은사였던 최광호 사진작가를 따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진 프로젝트에 동행하게 됐다. 이들이 향한 곳은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 지역.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에는 지뢰의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여기저기 내걸려 있었다.

삼엄한 분위기 속 일행들과 함께 초소로 돌아가던 그는 지뢰 표지판 앞에서 돌을 집어 공중으로 띄우고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찰나였지만 사진 속에는 작가가 포착해낸 많은 것들이 담겼다.

“멀리 비무장지대가 보였어요. 최전방에서 바라본 그곳 풍경은 아직 우리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했죠. 돌을 던지며 사진을 찍은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지만, 본격적인 작업의 계기는 이날이었어요.”

돌 아래 흩어 떨어지는 흙과 먼지 또한 역사적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해온 관찰자이자 감시자 역할을 한다. 돌을 던지고 이를 찍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 장소에 얽힌 특정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후에도 5·18민주광장, 해남 옥매광산, 노근리 쌍굴다리, 제주 곤을동 등 역사의 아픔이 새겨진 장소들을 찾아 프레임 속에 담아냈다.

이러한 ‘돌 던지기’ 작업은 사진을 통해 역사적 장소를 기록함으로써 다시금 질문을 던지는 행위를 나타낸다.

한때 그는 사진기자를 꿈꾸며 여러 시위 현장, 사건사고를 찾아다녔다. 그럴 때면 지금 이 순간이 일상인지 사건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는 했다.

“수많은 날들 가운데 어떤 일상이 오랜 시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면서 비로소 역사가 되는 거예요. 현대사회에서 각종 이미지가 범람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작품을 보여주는 일은 어려워요. 하지만 사진 속에 작가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대화거리를 던져주는 건 중요하죠. 그게 제가 지향하는 작업이에요.”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 작가가 적을 두고 활동해온 광주 그리고 5·18은 그의 작업 밑바탕이 됐다.

2021년 제1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메이투데이’에서 선보인 ‘에피소드’ 연작은 장소와 연관된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낸 작품이다. 사진은 ‘메이투데이’ 전시 전경.

2021년 제13회 광주비엔날레 5·18 특별전 ‘메이투데이’에 참여한 작가는 5·18 사적지인 구 국군광주병원에서 사진 작업을 펼쳐 보였다. 여기서 작가는 그가 애정하는 또다른 연작 ‘에피소드’를 선보였다. 옛 전남도청과 분수대, 소복을 입은 채 울고 있는 한 어머니의 모습, 그 옆에는 아이가 울면서 뛰어가는 장면의 사진 등이 줄지어 걸렸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 글쓰기 또한 수백 번 이상 크기와 위치 등을 조절하며 걸어 놓은 ‘작가의 개입’이다. 어떤 장소와 그와 연관된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하나의 ‘이미지 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작가는 최근 역사적 장소에 불을 밝히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푸른 낮과 붉은 밤_코발트광산’ 작품

2022년부터는 경산 코발트광산과 관련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곳은 1950년대 국민보도연맹 회원 등 3천여 명에 대한 학살이 자행된 곳으로, 아직도 수많은 유해가 묻혀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하며 코발트광산을 구성하는 오브제 자체에 집중했다. 오랜 시간 방치돼 잊히고 폐허가 된 역사적 장소에 조명을 설치하고 색색의 빛으로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이어갔다.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불을 켜는 행위잖아요. 역사적 장소에 인공적인 빛을 밝힘으로써 이 공간이 더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기억되길 바라요. 이곳을 조명하는 작업이나 전시는 예전부터 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남아있죠. ‘켜진 불’은 지금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 못다 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역할을 해요.”

역사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의 사진은 이처럼 관객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작가에게 ‘사진 작업’이란 어떤 공간에 대한 의식 내지는 자신을 다독이며 마음을 가다듬는 습관과 같은 행동이다. 그는 15년째 매일 아침 일어나 자신의 얼굴과 잠들었던 공간 등을 찍는다. 특별한 장면이나 사건을 찍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의식을 행하듯 자신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이유에서다.

“사진이라는 게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잖아요. 예전엔 그저 멋있고 근사한 사진만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특별한 게 아니더라도 일상 속 공간, 이야기를 품은 역사적 장소들이 나중에 제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더라고요. 관객이 작품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작가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어요.”

약 10년간 머물며 작업했던 대인예술시장 레지던시는 그의 첫 번째 작업실이자 그간의 작업에 대한 기반을 다지게 도와준 소중한 공간이었다. 작가는 지역 내 예술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문화공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문화공간에 대한 투자는 큰 공간들에서 지속해서 진행돼야 해요. 지원금이 삭감되면 당장 아무것도 못 하는 일회성 사업보다는 꾸준히 운영해나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조성돼야 합니다.”

매 순간 보다 의미있는 작업을 통해 관객들에게 대화를 걸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사는 ‘광주’를 기회의 도시라고 언급하며 지역 미술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레지던시, 문화공간 등이 곳곳에 자리한 광주는 작업하기에 참 좋은 곳이에요. 광주에 머물기 때문에 지역과 관련해 작업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광주에 부족한 점을 들기 위해선 최소한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해요. 다른 지역이든, 해외든 폭넓은 경험이 전제돼야 하죠. 아울러 문화예술기관들도 지역 작가들을 소개하고 연결해주는 역할을 함께 했으면 해요. 기획자, 정책 담당자 등 전문가들의 다양한 제언을 들을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될 필요성도 있죠. 작가와 갤러리, 기관 등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방법을 모색해간다면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광주 문화계가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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