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시인·시앤영 원장

저녁의 퇴근길은 늘 허허로운 느낌을 준다.

씽크대 홈통 바닥에 덩그마니 놓인, 미처 닦지 못한 이틀 전의 빈 밥그릇을 멍하니 내려다볼 때의 그 처연함과 불현듯 몸속에서 한 바가지의 뜨건 호흡이 툭 터져 몸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 남아있는 머릿속의 부연 적막을 느끼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도 한다.

몸이 움츠러드는 겨울 저녁은 이런 기분이 더 강하게 나타나 별난 외로움마저 찾아오는 경우가 있고 주위는 스산해진다.

그래서일까. 겨울 저녁의 퇴근길은 유난히 기다림과 그리움이 교차해서 숨이 가쁠 때가 있다. 이럴 땐 갓길에 차를 세운 채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토하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기는 한다.

집으로 쉬이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 동구 밖에서 찬별들을 바라보는 느낌은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하게 만들고 또 그 원인을 발견하게 하므로 역설적으로 슬픔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이와 같은 개인의 사소한 감성적인 하루일 망정 누군가 짓밟고 뭉개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는 속담이 있다.

깊은 물이든 얕은 물이든 자신이 직접 건너가는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일 게다.

사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사귀기 전에 첫인상만 보고 미리 상대를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사람들은 수없이 겪으며 후회의 늪에 빠져 자신을 한탄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다.

첫인상은 순간일 뿐, 영원하지 않다. 흉악범을 알기 전에 누가 그의 얼굴을 보고 범죄의 인상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겉은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온전히 믿어선 안 된다.

‘사귄다’는 말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이다. 결과는 그 과정에 속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 친구와 헤어지거나 애인과 이별하는 경우도 역시 그렇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이혼이 급증하는 걸 보면 결국 부부도 사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협의하면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게 진실한 ‘사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귀는 일은 자신이 투명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사람과 사귀면서 너무 큰 고통과 셀 수 없는 가스라이팅을 받아왔으며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었다. 새끼 캥거루처럼 주머니 속에 틀어박혀 세상에 대해 눈을 감은 채 국민을 기만하고 국민의 삶을 핍진(乏盡)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자는 단 하루의 여유도 없이 곧장 권좌에서 끌어 내려야 국민이 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방 면에서 검증되지 않은 자와 사귀는 일은 몹시 위험한 일이다.

지인 중에 서른 초반의 딸이 있는데 필자에게 들려준 말은 통쾌했다.

그날, 그러니까 탄핵소추가 가결되기 몇 시간 전에 그 딸이 사귀는 남자 친구에게 집회 장소에 가자고 했단다. 커피를 마시고 나오면서 딸이 여의도로 가자고 하자 남친은 광화문으로 간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즉시 결별을 선언했다고 한다.

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필자는 머리끝이 쭈뼛해져서 한동안 가슴이 뛰어 혼났다. 상쾌했다.

“…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사용한 시간들이야.”

“너는 네 장미에게 책임이 있어….”

-생텍쥐페리,『어린 왕자』, 김용기 옮김, 인디북, 2004.

마음이 얼음장 같지만,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살아있으므로 우리에겐 내일이 밝을 수밖에 없다. 잘못된 사귐은 애초에 사귀지 못한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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