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 2025’ 참여작가들. 왼쪽부터 최지목, 장미, 김자이, 강철규 작가.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면 숲처럼 줄지어 선 쇠파이프 사이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온다. 도마 위에서 무언가를 써는 소리,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 이슬람 사원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의 일상이 한 공간에 겹쳐진다. 발밑에서는 미세한 진동과 빛이 번갈아 올라온다. 김자이 작가의 설치 작업 ‘휴식의 기술 ver. 헤테로토피아’다.

김자이作 ‘휴식의 기술 ver. 헤테로토피아’

제25회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 2025’ 전시가 내년 2월15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열린다.

‘빛’ 전시는 하정웅 명예관장의 메세나 정신을 기리고 청년 작가 발굴과 육성을 위해 2001년에 시작됐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 권역에서 추천을 받아 네 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올해는 광주 김자이, 대전 강철규, 대구 장미, 경기 최지목 작가가 초청됐다.

김자이는 2010년 이후 꾸준히 ‘휴식’을 주제로 작업을 이어왔다. 빠르게 경쟁하며 살아온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에게 맞는 쉼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작업의 출발점이 됐다.

2018년 무렵부터는 타인의 휴식 방식을 리서치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국가, 인종, 거주 환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휴식의 소리를 묻고, 이를 녹음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모은 소리 가운데 30개가 설치 작업으로 구현됐다. 어두운 공간 속 쇠파이프 숲, 빛과 진동, 파편화된 소리들은 관람객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쉼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최지목作 ‘부재의 빛’, ‘태양 그림자’ 연작

같은 층의 전시실에서는 최지목 작가의 회화를 만나볼 수 있다. 독일 유학 초기였던 2007년, 작업실 소파에 누워 형광등을 보다 우연히 발견한 빛의 잔상은 고스란히 그의 작업이 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잔상이 하나씩 늘어나고,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고 다양한 색으로 떠오르는 경험이었다.

작가는 이때부터 ‘눈을 감고 보는 빛’을 회화로 옮기는 두 개의 축을 세웠다. 하나는 눈을 감았을 때 남는 잔상을 그리는 ‘부재의 빛’ 시리즈, 다른 하나는 강한 태양을 응시한 뒤 생기는 잔상을 기록한 ‘태양 그림자’ 시리즈다.

작업 방식 또한 남다르다. 보안경을 쓰고 태양을 응시한 뒤 곧바로 눈을 감으면, 망막 위 폭죽이 터지듯 강렬한 보색의 잔상이 남는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잔상이 도장 찍히듯 늘어나고, 눈을 조금만 움직여도 눈 안에서 스케치가 그려진다. 작가는 빈 캔버스를 바라보며, 화면 위에 남은 형태와 동선을 따라 색과 형태를 옮기는 식으로 작업한다.

한편에는 작가가 작업을 위해 만든 라이트 박스도 설치돼 있다. LED와 스포트라이트, 광확산 판재를 이용해 ‘태양의 빛’을 시뮬레이션한 장치다. 태양을 보기 어려운 날에도 잔상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었지만, 이번 전시에선 직접 빛을 바라보고 눈을 감으며 잔상을 경험해보는 체험의 장이 됐다. 원색의 회화와 색 조명이 겹쳐진 방 안에서 관람객들은 눈에 남는 또 다른 잔상으로 자신만의 회화를 경험해볼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강철규 작가의 회화가 이어진다. 화면 속 인물들은 작가의 자화상과도 같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심리학에서 쓰는 ‘투사’라는 용어를 가져온다.

강철규作 ‘분노’

그는 매일의 삶에서 자신에게 강하게 남은 사건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화면에 끌어온다. 작가는 때론 이런 개인적 이야기를 작업에 풀어놓는 일이 ‘민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고백하며, 실제로 한 작품 명제를 ‘수치’라고 붙이기도 했다.

눈보라 치는 밤, 늑대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담은 ‘분노’와 정체불명의 괴생명체와 싸우는 반인반수의 모습을 그린 ‘아이디어 괴물’ 등 내면의 불안과 모호한 감정을 내세운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명확한 해설 대신, 각자 자신의 경험을 투사해 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미술관 2층 또 다른 방에서는 장미 작가의 드로잉·설치·영상 작업이 펼쳐진다. 코로나 시기 미술관이 가장 먼저 문을 닫고, 주변에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작가는 “괜찮아질 거야”, “나도 그랬어”, “다들 결국 이겨내더라”라는 위로의 말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실제로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하며, 옆에 조용히 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진짜 위로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장미作 ‘How are you?’

전시장 구성은 마치 작은 극장을 연상시킨다. 미니어처 무대처럼 꾸민 공간 안에서 작은 스크린으로 영상을 볼 수 있고, 오르간을 닮은 설치물 한가운데선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동화책 속 한 장면처럼 꾸며진 터널형 오브제 안을 들여다보면, 작은 자동차 그림이 빙글빙글 돌며 터널을 통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좋은 날, 나쁜 날, 그저 그런 날이 모두 삶의 ‘수업’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어떤 날도 버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이번 전시는 일상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자신의 내면과 감정의 풍경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청년 작가들의 현재진행형 질문이 만들어낸 네 개의 ‘빛’이 미술관 곳곳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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