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설)
난고 김병연

천황씨 죽었는가 황제씨 죽었는가
온 산에 나무들이 상복을 입었거늘
내일에 조문케 하면 눈물방울 흘리겠지.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천황붕호인황붕 만수청산개피복
明日若使陽來弔 家家 前淚滴滴
명일약사양래조 가가첨전누적적

봄에 매화를 보면서 시를 음영했던 경우도 많았지만, 겨울의 설경을 보면서 음영했던 시도 부지기수였다. 시적인 배경이야 설경이지만, 느끼는 시인의 시상을 각기 달랐다. 설경과 희끗희끗한 머리털과 같은 선상에 놓았던 시상도 있고, 하늘의 선녀들이 남긴 발자국을 연상하는 시상도 있어 감정이입은 신선하다. ‘천황씨가 죽었다든가 황제씨가 죽었다든가, 온 산의 나무들이 모두가 흰옷으로 상복을 갈아입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내일 태양으로 하여금 죽음을 조문케 한다면(雪)’으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1807-1863)으로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이다. 후에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 됐다. 과거에 응시해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란 그의 할아버지를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했다. 이런 이유로 평생을 삿갓을 쓰고 방랑했다 해서 ‘방랑시인’이라 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천황씨가 죽었다든가 황제씨가 죽었다든가 / 온 산 나무들이 모두 흰옷으로 상복 입고 // 내일 태양으로 하여금 황제의 죽음을 조문케 한다면 / 집집마다 처마 끝에 눈물방울 흘리겠지]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눈을 보면서]로 번역된다. 눈(雪)을 주제로 한 시문은 많다. 눈이 적당히 내리면 다음해 풍년을 예측하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내리면 흉년을 예상하기도 한다. 인간 세상에 어느 대상이 적으면 희귀한 것이요, 너무 많으면 천덕꾸러기가 돼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되기 일쑤다. 눈이 내리면 추위를 동반하는 모양을 보고 기발한 사상을 엮었던 천재시인의 시심에 멍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눈이 내리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임금보다 더 높은 황제의 죽음을 상상한다. 천황씨가 죽었단 말인가 황제씨가 죽었단 말인가를 묻고, 온 산의 나무들이 모두 상복을 입었다는 뜻밖의 시상을 떠올린다. 눈과 상복을 같은 선상에 놓은 기발한 착상이다. 학문과 영욕, 때에 따라서는 음담패설(淫談悖說)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시인이고 보면 이 정도의 시상이란 시통주머니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화자의 기발한 시적인 착상은 내일 아침에 조문을 시키자하네. 내일 아침에 그것도 사람이 아닌 태양으로 하여금 조문하게 한다면, 아마도 온 나라의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는 주룩주룩 눈물방울 흘릴 것이라는 기발한 착상이다.

※한자와 어구

天皇: 천황씨. 崩: 임금이 죽음(薨: 제후가 죽음, 歿: 일반인이 죽음), 乎人: 사람이라 호칭함. 皇崩: 황제씨. 萬樹: 온 산 나무들. 靑山: 청산. 皆被服: 다 상복을 입다. // 明日: 다음 날. 若使陽: 태양으로 하여금. 來弔: 조문하게 하다. 家家: 집집마다. 前: 처마 앞에. 淚滴滴: 눈물방울을 흘리겠지.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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