途中(도중) / 진일재 성간

울타리 늘어지고 빗장 반은 걸리고
기우는 해 말 세우고 갈 길을 묻는데
늙은이 가랑비 소리 송아지 꾸짖는다.
籬落依依半掩扃 斜陽立馬問前程
이락의의반엄경 사양립마문전정
翛然細雨蒼烟外 時有田翁叱犢行
소연세우창연외 시유전옹질독행

“여보시오. 말 좀 물어봅시다. 이 고개를 넘어서 김서방네 집을 찾으려 가는데 몸은 피곤하고 뱃속은 후출한데 빠르게 갈 길이 어디인가요?”라고 물었다. 일을 하다 허리를 펴면서 “생원 양반은 글만 잘했지, 집을 찾는 공부는 서툴렀던 모양이요”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고자 하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것다. 길 가던 도중에 울타리 늘어지고 빗장이 반은 걸렸는데, 기우는 해에 말 세우고 더 갈 길을 묻는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소연히 가랑비가 푸른 연기 밖에 들리는데(途中)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진일재(眞逸齋) 성간(成侃:1427-1456)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경사는 물론 제자백가서도 두루 섭렵해 문장, 기예, 음률, 복서 등에 밝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학문에 큰 뜻을 두고 경사와 백가서의 연구에 몰두하다가 지나치게 노심이 돼 조서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울타리 늘어지고 빗장이 반은 걸렸는데 / 기우는 해에 말 세우고 갈 길을 묻자 했네 // 소연히 가랑비가 푸른 연기 밖에 들리는데 / 그때 마침 늙은 농부가 있어 송아지를 꾸짖으며 걸어가고 있었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길을 걷다 시상이 떠올라]로 번역된다. 길을 걸으면서 썼던 시가 상당히 있다. 즉사(卽事)나 즉흥(卽興)처럼 곧 생각이 나서 쓴 시상이 있고, 도중(道中)과 도중(途中)도 있다. 시적인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지기에 특별한 궁리 없이 시상의 그림을 만족하게 그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자유시처럼 즉석에서 척척 일궈 내는 그런 시적인 착상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시통 주머니도 온통 덩치로 범벅이 되는 시적 얼개를 치렁치렁 감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울타리가 늘어지고 빗장은 반은 걸렸는데, 기우는 해에 말을 세우고 갈 길을 묻고자 했다고 했다. 터벅터벅 갈 길은 만 리 인데, 해는 기울고 주막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이 훤히 그려지는 시상이다.

화자는 전경에 이어 또한 후경도 빼곡하게 그려짐을 만나게 된다. 소연히 가랑비가 푸른 연기 밖에서 들리는데, 그때 마침 늙은 농부가 있어 송아지를 꾸짖으며 간다고 했다. 차분한 밑그림을 그리노라고 후정을 가득하게 담는 것을 그만 깜박했음을 보인다. [가랑비가 농부에게 타이르기를, 따뜻한 칭찬 한마디가 더 좋다]는 정도였다면….

※한자와 어구

籬落: 울타리가 늘어지다. 依依: 아름답고 성하다. 半掩扃: 반만 결렸다. 斜陽: 빛이 비끼다. 立馬: 말을 세우다. 問前程: 앞길을 묻다. // 翛然: 소연하다. 빠른 모양. 細雨: 가는 비. 蒼烟外: 푸른 연기 밖에. 時有: 그 때에. (가는 비가 내리는) 그 때. 田翁: 농부. 叱犢行: 송아지를 꾸짖으며 걷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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