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4월말 봄비가 내리니 연구실 창밖에 토마토 모종을 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그래서 3년 전의 가슴 아픈 추억을 들쳐 보았다. 코로나19 기간에는 연구실에서 끼니를 간단히 해결하는 때가 많았다. 야채를 가꾸면 식사 때 싱싱한 초록을 먹을 수 있겠다 싶어 고향집 텃밭에서 상추 몇 포기를 캐와 연구실 밖 화분에 심었었다. 그러다가 욕심이 생겨서 고향집 다녀오는 길에 사평 오일장에서 방울토마토 모종을 사서 연구실 밖 큰 화분에 심었다. 그랬더니 가슴이 설레며 토마토가 열릴 여름이 기다려졌다. 내가 심은 것은 토마토 모종이 아니라,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날로 짙어 가는 푸르른 꿈이었음을 알았다.

연구실에 홀로 앉아 연구에 몰두해야 하는 연구자의 삶은 보기와 달리 늘 외롭고 고단하다. 연구직은 밤낮도 휴일도 따로 없고, 머릿속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항상 살아 꿈틀거린다. 연구하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생계가 해결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업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시간을 나누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다.

원하는 연구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구를 하다 보면 생각만큼 잘 진척이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연구실의 여러 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는 창밖에 심어놓은 토마토가 좋은 벗이다. 두어 달은 토마토와 더불어 연구에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었던 토마토 모종이 잘 자라 한 달 만에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렸다. 가지마다 잔뜩 열린 토마토가 잘 자라려면 충분한 영양이 필요할 것 같아 고향 집에 가서 퇴비에 요소까지 섞어 가져왔다. 잘 자라기를 바라며 거름을 뿌리 근처에 수북이 덮어주었다. 금요일 출장을 갔다가 일요일 밤 늦은 시간에 도착해 토마토 안부가 궁금해 나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불과 이틀 사이에 거의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주말에 비도 내렸으므로 물 부족 때문은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욕심을 내어 과하게 덮어준 퇴비가 토마토를 죽게 한 것 같았다. 퇴비를 걷어 내고 물을 주어 독성을 제거해보았지만 한 그루를 제외하고는 끝내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며칠 뒤 어머니를 뵈러 가서 말씀을 드렸더니 줄기가 약한 어린 토마토나 오이 등에는 두어 뼘 이상 떨어진 곳에 퇴비를 줘야 하고, 특히나 요소 비료는 원할 경우 조심해서 조금만 주어야지 뿌리 위를 바로 덮으면 말라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말씀을 통해 무지한 내 욕심이 빚은 사고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맥이 풀렸다.

우리의 삶에서도 한 번의 실수나 사고가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치명적 실수나 사고는 살아가는 내내 영원한 회한으로,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자녀들을 너무 보호하려 하지 말고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게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모들이 선뜻 그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치명적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리라. 일반적으로 말하는 실수와 사고는 예방주사처럼 오히려 성장에 보탬이 되는 회복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예전에 잘 길렀던 것은 운이 좋아서였나 보다. 전문 농사꾼인 어머니도 농사를 망칠 때가 있는데 나 같은 왕초보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얼마전 다시 모종을 사왔다. 말라버린 토마토 줄기는 뽑아내기 전에 사진으로 찍어 내 기억 속에 심었다. 그리고 절망을 뽑아낸 그 자리에 새 희망을 심었다. 다시 토마토가 열리는 여름을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우리의 치명적 실수도 이처럼 뽑아낸 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가슴 아픈 추억도 아름답다. 대학 연구실에서의 삶이 이제 종착역을 앞두고 있다. 천국을 나서야 하는 아담처럼 연구실을 떠나야 하는 불안감이 종종 나를 감싼다. 좋은 직업을 갖고 한평생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를 드리며 현직 마지막인 스승의 달 오월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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