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1구 얼그실마을에서 바라본 무등산 풍경.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인 이날치는 이 마을에 살던 류씨 집안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이날치는 대명창 박유전(朴裕全)에게 서편제(西便制)를 계승했고 무등산 자락 증심사에 들어가 수년간 소리 수련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광주매일신문 자료사진>

한국관광공사의 한국 홍보 유튜브에 ‘범 내려온다’라는 영상이 올라가면서 ‘이날치’라는 밴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밴드 ‘이날치’는 실존했던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이날치(李捺治, 1820-1892)의 이름에서 따온 밴드다.

150년 전 ‘이날치’라는 이름은 지금 시각으로도 멋진 이름이다. 담양군 수북리에서 태어난 그는 창평 류씨 집안의 머슴살이를 하다가, 마을에 공연 온 남사당패를 쫓아가 줄 타는 광대가 됐다.

바닷물고기 날치와 같이 날쌔게 줄을 탄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날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이가 들어 줄타기를 접은 그는 판소리에서 ‘얼쑤’하면서 흥을 돋는 소리북을 연주하는 고수로 일했다. 고수로 일하면서 10년 후배였던 명창 박만순 밑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게 된다.

경멸은 뒤로하고 세숫물과 발 씻는 물까지 떠오라는 시중에 화가 난 이날치가 발 씻던 물을 박만순 얼굴에 쏟아버렸다. 소중하게 지니고 다니던 북통까지 박만순에게 던져버린 이날치는 그날로 고수 일을 그만두고 판소리를 배우게 된다.

이 일화를 통해 그가 칼날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성품과 줄 타는 솜씨, 그리고 소리하는 모습이 날치처럼 미끈미끈해 ‘날치’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고 한다.

이날치는 명창 박유전(朴裕全)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무등산 증심사에서 득음을 얻게 됐다.

목소리 성량이 커서 그의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의 전매특허인 쉰 목소리와 함께 컬컬하게 나오는 소리, 그리고 한이 섞인 목소리는 관객을 웃고 울렸다. 누구도 그의 감성과 성량, 흥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이날치가 ‘새타령’을 노래하면 정말 새가 그의 노래를 듣고 날아들었다 한다. 이 소문이 전국에 퍼져 흥선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하게 됐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 앞에서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팔리는 대목’을 불렀고, 그만 이최응이 눈물을 흘리게 됐다.

“대장부가 어찌 광대의 재주에 웃고 울게 되는 것이냐?”

이최응은 이날치의 재주를 높이 평가해 ‘무관선달’의 직계를 그 자리에서 제수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춤과 랩, 그리고 노래까지 겸비한 다재다능한 연예인이었다.

그래서 밴드 ‘이날치’가 줄타기 명인이면서 판소리 명창 이날치를 헌정해 2019년 얼터너티브 팝 밴드를 결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올해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한 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는 전통 가락에 퓨전 요소를 가미해 클럽에서 춤을 출 정도로 빠른 박자의 노래이다.

유튜브 3억 뷰를 넘긴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에서 토끼를 찾아 나선 자라가 그만 턱에 힘이 빠져 ‘토생원’을 ‘호생원’으로 잘못 부르자 호랑이가 나타나 자라를 덮치는 한 장면을 담은 곡이다.

-범 내려온다- (가사 중 일부 발취)
주홍 입 쩍 벌리고 자라 앞에 가 우뚝 서
홍앵앵앵 허는 소리 산천이 뒤덮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을 제.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양 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숭덜숭,꼬리는 잔뜩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담양군 수북면 성암야영장 입구에 세워진 ‘국창 이날치 기념비’. 기념비는 높은 단 위에 북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소리는 흔적도 없고, 한 때 온갖 모멸을 감수하면서 메고 다녔을 소리북의 형상이, 종살이로부터 시작해 줄광대, 고수를 거쳐 마침내 대명창이 된 이날치의 예술가로서의 험난했던 구도의 길을 어렴풋이 얘기해주고 있다. <광주매일신문 자료사진>

‘범 내려온다’는 자라와 토끼, 호랑이, 그리고 명창 이날치를 소환했다.

명창 이날치가 활동했던 1850년에는 소리꾼들의 활동 무대가 미미했다.

줄타기에서 소리까지 당대 최고의 ‘끼’를 지녔던 이날치는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생전에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밴드 ‘이날치’가 그의 한(恨)을 풀어 줬다. 이날치의 줄타기를 복원, 보존하고 있는 단체 ‘나르샤 이날치’(대표 박이식)도 담양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르샤 이날치’는 이날치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잊혀진 줄타기를 계승하기 위해 지난해 창단됐다. 이날치 줄타기 교육장을 설립하고 교육생을 선발해 시연회를 선보이고 있다.

이날치가 태어난 담양군 대방리에 ‘이날치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나, 국악에 관심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날치가 누구인지, 담양 출신인지도 몰랐다.

최근 밴드 ‘이날치’가 등장하면서 국악과 판소리에 관심을 끌게 됐고, 실존 인물 이날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판소리를 연극화한 ‘창극’이 유행한 시기는 1900년 초이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 세워지면서 뮤지컬 형식의 판소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신광재·역사문화 전문기자

원각사는 전문적 극장시설을 갖춘 600석에서부터 최대 천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현대 연극의 시초가 됐다.

소리꾼들에게 원각사는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였지만 1914년 화재로 소실돼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췄다.

이날치가 원각사 무대에 서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종 사촌 동생 김창환(金昌煥, 1855-1937)이 원각사의 최고 스타가 됐다.

김창환은 지금으로 말하면 조선의 최고 탤런트였다. 그 시절 김창환이 원각사 무대에 출연한다는 포스터가 붙으면 전국에서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광산구 삼도동 출신인 김창환은 사촌 형이었던 이날치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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