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두서의 그림 실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물화다. 당시 독보적인 인물화 실력은 숙종의 초상화 제작에 추천됐다. 그러나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냈던 남구만(南九萬)의 반대로 좌절됐다. 서인이었던 남구만은 젊은 시절 윤선도의 상소를 반대했던 인물이다. 남인의 수장이었던 윤선도는 효종의 묘지 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서인의 송시열과 싸우다가 유배를 당했다. 그 때문에 실권자였던 남구만은 윤선도의 증손에게 숙종의 어전을 맡기지 않았다.
예리한 관찰을 중요시한 윤두서의 인물화 실력은 ‘자화상’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자화상은 몸을 완전히 생략하고 얼굴에만 역점을 둔 독특한 그림이다. 정확하고 섬세한 필치로 윤두서 자신의 정기 어린 눈과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 귀티 나는 수염 등을 묘사했다. 외적인 표현보다 그의 미묘한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력, 그리고 동양 초상화가 추구하는 정신과 마음을 담고자 했다.
국보로 지정된 자화상은 42세 때, 죽기 5년 전에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 마치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두툼한 입술은 꽉 다물어 지금으로 치면 꼬장꼬장한 사람이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터럭 한올 한올까지 세밀하게 표현한 그의 섬세함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눈은 조금 패여 있지만 약간 치켜뜬 눈빛은 강렬하다. 덥수룩하지만 단정하게 정리한 수염에서는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고, 깊은 주름을 지으며 굳게 다문 입에서는 진중한 성격이 보인다.
얼굴만 그려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가슴 부분의 옷깃과 옷 주름까지 선명하게 표현된 자화상이었으나 종이에 달라붙은 점착력이 약해져 지워져 버렸다. 해남 녹우당(綠雨當)에서 태어나 역시 녹우당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정약용이 강진과 해남에서 유배 18년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흠흠신서’ 등을 집필할 수 있었던 토양은 그의 외가 해남윤씨 가문이 있어서 가능했다. 1만 권의 책이 있었던 녹우당은 다산의 학문을 완성할 수 있는 도서관이었다. 그의 외증조부 윤두서가 없었다면 정약용도 없었을 것이다.
|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한국미술사 분야에서는 풍속화의 아버지로 윤두서를 평가하고 있다. 풍속화 하면 김홍도와 신윤복을 떠올리지만 산수인물화에서 풍속화로 바꾼 인물이 윤두서다.
조선후기 풍속화의 뱃머리는 윤두서와 조영석(趙永錫)과 같은 일부 진보적인 사대부 화가가 앞장섰다. 사대부들이 문화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시도가 김홍도나 신윤복과 같은 중인들에 의해 이뤄질 수 없는 사회였다. 조선 풍속화의 시작을 알렸던 윤두서의 풍속화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참고로 풍속화는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 속에는 인간의 신앙, 정치, 생활, 사상 등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인간과 호흡을 함께 하는, 인간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장르로 시대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윤두서의 초기 풍속화인 ‘짚신 삼기’는 조선후기 풍속화를 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선비가 아니라 농부가 등장하고, 기존에 자연을 벗 삼은 행위가 아니라 짚신을 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배경 형식은 16-17세기 유행한 산수인물화를 빌리고 있다. 등장인물이 짚신을 삼는 농부라는 점이 파격적이다.
|
후대에 농부의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金弘道)의 등장인물과 달리 윤두서가 그린 농부는 땀 내음보다 조용히 자족하는 선비의 정취가 아직은 풍긴다. 작품 배경과 내용이 다소 어울리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실험과도 같은 시도였다. 산수인물화에서 늘 표현되는 고고한 공간 속의 선비가 짚신 삼는 농부로 바뀌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향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또 다른 산수인물화식 풍속화 ‘목기 깎기’는 좀 더 풍속화다운 면모가 보인다. 무엇보다 풍속 장면과 맞지 않은 산수의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풍속 장면만을 요약적으로 강조하였다. 이제 비로소 산수인물화로부터 독립하여 풍속화로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
인물의 모습보다는 기구의 작동방식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목기 깎기’에서는 그의 실학적인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윤두서는 실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지도, 의학, 그리고 농민 생활의 개혁 등 실학적인 탐구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김홍도와 신윤복 등에 의해 꽃피우게 된 풍속화는 윤두서 실학적인 풍속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엇갈리는 전환기에 살았던 그의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경향을 띠기 시작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그의 회화세계는 조선후기 화단의 방향을 설정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윤덕희(尹德熙·1685-1776)와 손자 윤용(尹容·1708-1740) 역시 풍속화를 남겼다. 특히 손자 윤용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 윤두서 못지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그의 작품 ‘나물 캐는 여인’은 할아버지 윤두서의 ‘나물 캐는 아낙(채애도)’에서 따온 소재이다.
|
일손을 방금 멈춘 채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낙을 그리고 있다. 낫을 들고 바구니를 옆에 낀 채 잠깐의 여유 속에 던지는 시선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배경은 아낙의 발 근처에 엷은 먹으로 툭툭 쳐서 몇 포기의 풀과 땅만을 표현하고 빈공간을 확대해 더욱 그 시선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아낙의 앞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구릿빛 나는 근육질의 종아리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억센 시골 아낙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도시적인 세련미가 넘치는 윤두서의 ‘나물 캐는 아낙’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사실성을 엿볼 수 있다.
평생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선비 화가로 유명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3재’라고 불렸다. 윤두서가 활동하던 시기는 변화와 개혁의 싹이 트이던 시기로 그의 그림에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림 속에서 비로소 조선의 인물과 조선의 생활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중국풍에서 벗어나 그림 속에 조선의 모습과 조선의 농부를 등장시킨 최초의 화가다.
|
정계에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부유해 많은 그림을 남겼다.
가문의 종가인 녹우당에 ‘자화상’도 소장하고 있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1713년 46세 때 서울 생활을 털어 버리고 해남 집으로 돌아왔고 2년 후에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는 한국사와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2026.10.15 (목) 1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