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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우리가 소원했던 영보촌에 왔구려!”
“월출산을 이렇게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오”
“그동안 내 가슴이 무척 답답하고 마음이 복잡하고 정신이 맑지 못하고 몸은 무거웠는데 여기에 오니 그런 일들이 싹 가신듯합니다.”
“여보! 다시 한번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소!”
“한양에서 천리 길 영암까지 왔으니 이제는 못 누린 여유도 찾고 풍류도 즐기면서 보내고 싶구려!”
“여보! 그동안 갈고닦은 학문 지식을 후학을 위해 쏟을 생각이요!”
그의 초상화는 영보마을 영보정 존양루에 봉안됐는데, 조선시대 사대부상 중 가장 빠른 작품으로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몽골식 모자인 ‘발립’을 쓰고 평상복을 입고 있는 최덕지의 초상화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과 고려시대 초상화의 형식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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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지 초상화를 보면 청포를 걸치고 허리에 홍대(紅帶)를 둘렀는데, 이는 고려 말에 유행했던 복장이다. 조선 초 허리띠는 최덕지 초상화처럼 허리를 두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허리띠가 자꾸 흘러내렸던 까닭에 옷 양쪽 겨드랑이 부분에 ‘U자’형 고리를 달아서 허리띠가 내려가지 않도록 잡아줬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 초상화는 허리띠가 가슴팍까지 올라가 있다. 모자는 고려 시대 남자들이 쓰던 ‘오건’(烏巾)으로 단추와 같은 돌기가 있어 독특하다. 책상을 앞에 놓고 책을 읽는 선비의 모습은 고위 관료를 지낸 최덕지의 위상을 드러낸 동시에 향리에 은거한 선비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그렸다.
- 사실적이고 세밀한 묘사 ‘시대상 반영’ -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의 복장으로 인해 이 초상화가 더욱 주목된다. 모자는 감투형에서 평량자형(平凉子型)으로 ‘패랭이’라고도 하는 갓으로 발전돼 가는 과도기적 형태이다. 최덕지가 생존했던 조선 초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입고 있는 옷은 고려 말로부터 전승돼 온 원나라의 영향이 조선 초까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최덕지 초상의 차림새는 여말선초 한가하게 집에 있는 선비의 모습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얼굴 모습으로 미뤄보아, 이 초상은 70의 나이에 가까운 모습이다. 얼굴 안면과 옷 주름 처리는 실물과 아주 비슷하게 그렸다. 모자는 여름에 쓰는 것으로 원나라 양식으로 반투명으로 안의 상투 부분이 검게 비치고 있다.
얼굴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 계의 색조를 띠고 있으며 눈썹은 엷은 먹으로 칠한 위에 그 털은 한 올 한 올 표현됐다.
짙은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눈매에서는 생기있는 명상적 눈빛을 보여준다. 공들여 묘사된 풍성한 수염 등은 화가가 인물을 앞에 두고 사실에 따라 제작했음을 말해준다.
생기에 찬 눈매, 수염 처리 등에서 있는 그대로 그려 초상화의 사실감을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최덕지 초상화는 비단에 그린 조선 초기 문신의 초상화로서 조선 시대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대부 초상화이다. 조선 시대의 표현 방식과 기법, 복식 등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선비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회화사적인 흥미를 끄는 것은 사실과 다른 최덕지의 주먹코다. 조선 초기 초상화의 대부분이 코를 거의 옆모습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해서 이 초상화에서 코 처리는 시각적 진실을 보여준다. 안면 및 시선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을 향해 있으므로 자연히 오른쪽 어깨와 팔이 정면에 맞도록 돌려져 있다. 이 점이 인물의 표현상 대칭성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표현적 특색으로 변질한 면도 있다. 고려시대 초상화의 연장선에 있음을 말해준다.
- 여말선초 복색, 필법 고찰 귀중한 문화자료 -
최덕지를 그린 화가는 알 수 없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직관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당대에도 이 작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희귀한 여말선초 초상화의 형식, 복색, 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시에 초상화의 본래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 한정되지 않고 정신을 그리는 데에 있음을 대변해주는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화가의 초안 과정을 보여주는 ‘최덕지 초상’ 초본은 유지 바탕에 필묵으로 스케치한 것으로 원본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 초본과 원본은 조선 초기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초상화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나주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가고 수년 후 파보니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부 수정이 필요했고 그 후 초상화를 종손가에 모신 사실이 확인된다.
1451년(만 67세) 노령을 이유로 사임하자 사육신 등 당대 석학 28인이 노량진 나루터에 나와 시부(詩賦)를 지어 칭송하며 송별했다고 한다. 최덕지는 영암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고 민생현장을 돌보며 상생 공동체의 단초를 모색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문신인 김육이 1651년에 저술한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보면 최덕지와 관련해 “초상화를 하사하므로 영광이 한 시대에 크게 빛났다”(其像賜之一時名勝)는 문구가 있어 초상화가 문종의 하사본임을 알 수 있다.
최덕지와 그 사위 신후경(거창신씨)이 지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 영보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지만 후손 최정, 신천익 등이 중건해 역사성과 조형미, 기술성 등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2054호로 지정됐다. 존양루 현판은 안평대군 친필이라고 한다. 존양루에는 최덕지가 낙향할 당시 노량진에서 송별했던 류성원(‘유미사송최선생’ 동문선 수록), 이개, 하위지,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서거정, 김종서 등 28인의 송별시가 현판으로 보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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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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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지의 고향은 전주이다. 그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처가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으로 갔다.
거창신씨 자자촌인 영암 영보촌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낙향한 그는 5년간 살다가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문종이 영정 1본과 유지 초본을 하사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최덕지를 기리고자 영당을 세워 영정을 모셨다. 후손들은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祭祀)하고 있을 존(存), 기를 양(養), 사당 사(祠)‘존양사(存養祠)’라 이름하였다. 존양이란 호는 이때 얻은 것이다.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는 한국사와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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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목) 1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