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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우리나라 이혼 건수는 매년 10만명 이상으로 이혼이 흔한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이혼이라는 게 있었을까?
조선의 국법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혼은 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처럼 이혼서류를 작성하는 절차를 밟은 이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도저히 살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조선에는 이혼이 없었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이혼은 출처(出處), 휴기(休棄), 이이(離異) 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였다.
출처는 ‘처를 내쫓는다’라는 뜻이고 휴기는 ‘버린다’라는 의미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걸 말한다. 물론 남편이 이혼당하는 경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이’는 강제이혼을 말한다. 조선 조정에서 강제로 이혼을 시키는 거다. 대표적인 강제이혼은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역모와 관련됐을 때 하는 강제이혼이다. 이러한 경우는 이혼이 매우 쉽게 이뤄졌는데, 역모죄는 가문이 무너짐에 따라 재빨리 손절매하는 게 어찌 보면 현명한 일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강제이혼은 아내가 남편에게 욕을 하거나, 부모와 조부모 등을 살해하는 경우,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때렸을 때이다. 남편이 아내를 폭행했을 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역모에 의한 강제이혼보다 절차가 까다로워 거의 이혼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이혼은 양반과 양민이 달랐다. 비교적 이혼이 쉬웠던 양민과 달리 양반이 이혼하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혼을 인정하지 않은 조선에서 왕이 이혼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어서 허가를 받기 쉽지 않았다.
양반의 경우 이혼허가를 받으려면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유는 아내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죄를 저질렀다는 거였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 음란한 여자, 질투가 심한 여자, 나쁜 질병이 있는 여자, 말이 많은 여자, 도벽이 있는 여자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조건 남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 별도로 ‘삼불거’(三不去)라고 하는 아내를 내쫓을 수 없는 세 가지를 마련했다. ‘가난할 때 시집와서 집안을 일으킨 여자’,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렀을 때’, ‘갈 곳이 없을 때’로 규정했다. 따라서 이혼허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백성들은 ‘사정파의’·‘할급휴서’로 이혼 -
반면 일반 백성들의 이혼은 비교적 쉬웠다. 양민이 이혼하는 방식은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사정파의’로 부부가 같이 살 수 없는 이유를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고, 합의로 헤어지는 요즘의 합의이혼이다. ‘파의’는 ‘일이 잘 안돼 마지막이 되다’라는 우리말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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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할급휴서’로 ‘휴서’는 이혼문서를 뜻한다. 그러나 국법에 이혼이 없기 때문에 문서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법적 근거는 없었다. 그 때문에 이혼할 때 이혼을 증명하는 물건을 줬다. 저고리의 옷섶을 잘라서 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인데, 그래서 가위로 옷을 잘라서 준다는 의미로 할급휴서이다.
글을 잘 모르는 양민들 사이에는 ‘휴서’라는 말이 ‘수세’로 알려졌는데, 수세를 주게 되면 아내는 재혼이 묵인됐다.
세모 모양의 옷섶을 ‘나비’라고도 하며, 나비를 받은 여자는 이것을 가지고 등에는 이불보를 진 채로 성황당(서낭당이라고도 함)에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새로운 남자를 기다리면 된다. 나비를 가진 여자를 최초로 만난 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관습적인 의무를 져야만 했다. 최초로 만난 남자에게 나비를 보여주면 남자는 여자가 등에 진 이불보로 여자를 보쌈해 집으로 데려가면 결혼이 성사된다. 부랑자거나 노인, 노비라면 매우 곤란한 노릇이었을 게다. 때문에 ‘최초로 만난 남자’라고 했지만, 한 여자의 일생을 책임질 능력 있는 남자라는 암묵적인 조건이 더 하나 붙어있었다고 보면 된다.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서 유교의 순정적인 삶과 정절, 그리고 평생 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양반집 여인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반의 이혼, 국론의 장에 오르기도-
#숙종 30년, 1704년 9월24일.
사헌부(司憲府, 지금의 대검찰청)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아내를 내쫓는 법이 없으므로 비록 사나운 아내와 행실이 나쁜 아내가 있더라도 감히 서로 인연을 끊지 못합니다. 좌수운 판관(左水運判官) 유정기(兪正基)의 아내 신씨(申氏)는 성품이 사납고 괴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지아비를 꾸짖어 욕하면서, 더러운 물건을 제사상 제주(祭酒)에 섞고 사당(祠堂)에서 난동을 부려 물건을 파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정기가 예법에 따라 죄를 사당에 고하여 내쫓았습니다. 그 후 아들의 집에 머물게 되니, 신녀(申女)는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또 성을 내어 한밤중에 단신(單身)으로 걸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여자가 집을 나가는 일은 이보다 큰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조에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씨의 패악한 행실은 가까운 이웃과 같은 마을 사람이 환하게 알지 못하는 이가 없고, 또한 눈으로 보고 직접 들어서 전하는 자가 있으니, 이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숙종은 예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사헌부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 ‘숙종실록 40편’
1690년, 유정기가 신씨를 내쫓기 위해서 처의 사나운 성품을 서술해 이혼소송을 15년 만에 제기했다. 유정기는 전처가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후, 1677년 양반집 규수 신태영과 혼인한 후 다섯 자녀를 연달아 낳을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그런데 유정기가 첩을 들인 후 부인 신씨의 행실이 난폭해지고 사당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구실로 신씨를 쫓아냈다. 그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예조에 이혼을 신청한 것이다. 당시 유정기의 나이는 환갑이었으며, 신씨는 50대 초반으로 요즘으로 치면 황혼이혼인 셈이다. 이 사건은 조선 이혼소송 사건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추관지 등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이혼소송을 담당하는 예조에는 이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았고, 급기야는 사헌부와 예조가 격한 충돌을 하게 된다. 숙종의 중재로 의금부와 형조에서 조사하라는 명이 떨어졌지만,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고 눈치만 보게 된다. 15년 전 사건이다 보니 증거도 불충분하고 잘못 판결했다가는 모든 화살이 자신들에게 향할 것 같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손사래를 쳤다. 마침내 숙종은 그렇다면 삼정승과 대신들이 논의하라는 명이 떨어질 정도로 희대의 사건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건이 15년 전 일이어서 증명하기 어려웠다. 국법에 이혼의 법이 없었다. 신태영이 밤에 혼자 나간 것을 정조를 잃었다고 규정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1차 소송에서 이런 이유로 숙종은 예조의 손을 들어줘 이혼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러자 유정기와 문중 친척 50여 명이 재차 이혼을 요구했고, 숙종의 능행차 길을 막고 호소하자 숙종이 이를 받아들여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사헌부는 곧바로 신태영을 옥에 가두고 다시 전면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사실 사헌부에 유정기 큰아들 유언명이 지평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지평의 관직은 지금의 검사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유언명은 죽은 전처의 아들로 새어머니었던 신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정기의 뜻대로 사건이 전개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조와 의금부에서 다시 강력하게 반발하고 예조판서가 숙종을 독대하게 된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유정기 아내를 이혼시키는 일로써 청대(請對)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15, 6년 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제 와서 조사하며 구명하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하물며 집안에서 한 일은 다른 증언이 없고, 첩과 아들들을 더욱 추문(推問)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난처하므로 이미 여러 대신과 서로 의논해 전하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의금부에서 심문해 조사한 결과 모두 들은 이야기일 뿐 직접 본 사람은 없었고, 신씨가 집을 나간 이유는 첩과 유정기의 성품 때문으로 조사됐습니다. 따라서 명백한 증거도 없이 이혼을 시킨다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끊어지고 정실부인과 첩과의 관계가 복잡해져서 나라가 혼란해질 듯합니다.”
예조판서 민진후 말이 바르다고 생각한 숙종은 신씨를 1706년 4월 유배시키고 유정기는 가정을 잘못 다스린 죄로 장 80대에 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에도 이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년이 지난 1712년, 유정기는 다시 숙종 행차 길에 나아가 이혼소송 글을 올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송 당사자가 사망했다. 하지만 또다시 사헌부에서 이혼소송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년간의 이혼소송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
왜 유정기는 신씨가 집을 나간 후 15년이 지난 후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조정에서는 9년 동안 소송을 제기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또한, 예조와 사헌부의 다툼은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혼소송 하나로 대신들까지 나서 토론하고 있다고 깎아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의 체계를 흔들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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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에서 극구 반대한 이유는 이혼을 시켰을 때 이러한 사례가 계속 발생할 것이며, 조선의 근본적인 유교질서를 무너뜨리는 사건이라는 판단하에 9년간 사헌부와 싸웠다.
결과적으로 조선 양반이 이혼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는 한국사와 한국미술사 고고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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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목) 14: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