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광주목사로 부임한 신보안은 관아기생 소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소매는 장군을 역임하고 은퇴한 노홍준의 첩이었다. 조선시대 관기는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신의 미모를 뽐낼 수 있었다.
신임사또 축하 연회가 열리던 날, 소매를 본 신보안은 그녀의 고운 춤과 고고한 자태를 보고 마음을 몽땅 빼앗겼다. 환갑에 가까웠던 신보안은 사또가 살펴야 할 일은 뒷전이고, 오직 소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고을 원님의 힘이 막강한 터라 소매는 신보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몰래 사랑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또와 소매의 불륜 스캔들이 순식간에 고을 곳곳으로 퍼졌고, 노흥준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다.
성질이 급한 노흥준은 곧바로 관아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사또 신보안을 죽지 않을 만큼 구타했다. 당시 사또는 행정권과 군사권, 그리고 사법권을 지닌 무소불위의 자리였지만, 불륜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는 사내에 불과했다. 더욱이 노흥준은 소매를 집으로 데려가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4개월 동안 관아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집에 가둬 버렸다.
관기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일정 기간 관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신보안은 노흥준에게 죄를 묻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숨지고 말았다. 이 사건이 조선 최초의 ‘수령 구타사건’이다. 이 소식은 신보안이 사망한 후 1년이 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수령 구타사건’ 빌미 무진군으로 강등 치욕
#1429년 세종 11년 11월13일 조정.
훗날 단종을 지키기 위해 수양대군(이후 세조)과 맞서다 계유정난 때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던 좌의정 김종서가 이 사건을 세종에게 보고했다.
“광주목사 신보안이 고을 기생 소매와 간통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의 서방 전 호군(護軍) 노흥준이 기생을 결박하고, 신보안을 능욕했습니다. 흥준이 질투 끝에 신보안을 때려서 그 이유로 죽었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직접 사헌부와 형조, 두 곳에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신보안의 비서와 광주목 관아 향리, 노흥준이 소환되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형조와 사헌부의 보고를 받은 세종은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렸다.
수령을 때린 노흥준은 장 1백 대를 때리고 강원도 변방의 일개 군영으로 쫓겨났다. 무엇보다 수령을 구타한 사건을 이유로 ‘광주목’ 지위를 무진군으로 강등시켰다. 즉 수령은 임금을 대신해 일하는 신하이기 때문에 어떠한 잘못이 있어도 수령을 고발하거나 구타해서는 안 되는 법을 당시 세종이 반포한 바 있다.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계수관 장흥부의 지휘를 받도록 한 이 조치는 조선 최초의 ‘읍호강등’사건이다. 광주가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안게 됐다. 광주목의 지위는 나주목 다음이었는데, 장흥부의 지위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읍호 강등은 광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계수관은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행정기구로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 군, 현을 감독했다. 이후 광주 백성들은 20년 이상 광주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건의 발단이 애매해 위로는 산천의 귀신과 아래로는 향촌의 아이들까지 모두 억울함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도 능히 그 일을 호소하지 못한지가 여러 해가 됐다.”
위 기록처럼 광주의 명망 있는 선비들이 여러 차례 세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세종이 죽고 ‘읍호강등’ 20년이 지난 1451년(문종 원년) 여름, 예문제학 이선제(李先齊, 1390-1453)가 발 벗고 나섰다.
당시 좌의정 황보인과 가까웠던 그는 순성군 이개, 우참찬 안숭선, 이조판서 권맹손, 전 동지중추원사 유맹문 등에게 광주의 ‘읍호복원’ 정당성을 설파했다. 수차례 조정 대신을 찾아가 설득한 이선제의 노력 끝에 이개와 좌의정 황보인 등이 문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토지의 광대함과 인물의 번창함이 서남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서 실로 전라도의 한 도회소(都會所)입니다. 구호(舊號)로 회복하도록 허가하여 경신(更新)할 길을 열어 주소서.”
‘읍호 복원’ 주역·희경루 창건에도 큰 역할
조정에서는 이선제가 나섰고 광주에서는 유향 품관과 인리(人吏) 등도 상소를 올렸다. 노력의 결과, 문종은 1451년 6월7일,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읍호를 복원해 줬다.
이 시기에 광주관아에 누각을 짓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광주 원로들이 광주태수 안철석에게 누각의 이름을 건의했다.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라는 뜻을 담아 ‘희경’(喜慶)으로 누의 이름을 지어 기쁨을 기념하고자 청하였다. 지금의 ‘희경루’(喜慶樓)라는 이름의 어원이다. 읍호복원의 중심에 섰던 이선제도 ‘희경루’에 글을 남겼다.
“노소가 흔연히 경사스러움을 기뻐하니, 끝없는 이 즐거움 해마다 이어지기를(老少欣然然喜慶 願令此樂樂年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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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루는 광주목 관아 누각으로 사또가 정무를 보는 건물이다. ‘희경루’의 원래 자리는 동구 충장로 광주우체국 옆이다. 1914년 무렵까지 남아 있었지만, 도시화로 인해 시내가 바라다보는 광주공원 한쪽에 새로 지었다.
이선제는 고려 마지막 왕인 1390년(공양왕 2년), 광주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1419년(세종 원년) 증광시에 급제한 이후 1453년(단종 원년)까지 30년 이상을 관직에 있었다.
6조의 관료와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후, 집현전 재직 당시 살펴본 옛 제도를 바탕으로 각종 정책 상소를 올리는 등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자우부빈객의 관직을 받는다. 세자우부빈객은 다음 임금이 되는 단종을 보필하는 관직이었다. 세자의 정무처결 기관이 설치되자 첨사원동첨사로 발탁된 이선제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당시 이선제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의 첨사원 관직에 등용되면서 집현전 출신 학자들이 정치 세력화하는 계기가 됐다.
단종을 보필하기 위해 조정에서 백방으로 뛰던 이선제는 과로사로 갑자기 숨을 거둔다. 향년 64세였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1년 전까지 ‘시의소’ 및 ‘단군신전건립소’를 올리고, 심지어는 중국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로 임명됐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올린 상소에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죽음의 원인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선제는 1453년(단종 원년) 겨울에 서울에서 사망한 뒤 이듬해 봄, 상여로 광주 만산동으로 옮겨 할아버지 무덤 옆에 장례를 치렀다. 지금의 남구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묘지(墓誌)와 함께 부조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분청사기로 제작된 그의 신도비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는 1998년 6월 김포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밀반출됐다가, 2017년 9월 일본인 소장가의 기증으로 국내로 환수된 문화재이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1993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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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제 묘지는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돼 기록이 제대로 전하지 않은 그의 가계와 이력 등을 알 수 있게 해줬다. 또한 15세기경 변화하는 상장의례와 도자 기술, 서체 연구를 위한 중요한 편년작으로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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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문대로’…도로명이 된 광주의 큰 인물
현재 ‘광주 사거리’에서 ‘산수오거리’를 지나 ‘서방사거리’까지를 ‘필문대로’라고 일컫는다. 이 도로명은 바로 ‘필문’ 이선제(1389-1454)를 기리기 위한 거리명이다. 이선제가 어떤 인물이기에 광주의 큰길에 그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는 대학에서 한국사와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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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목) 13: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