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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특출나고 비범한 능력을 지닌 제주도 대표 인물 4인을 ‘탐라사절’(耽羅四絶)이라고 하는데, 풍채의 양유성, 풍수의 고홍진, 의술의 진국태, 점술의 문영후가 그들이다.
조선 중기 제주도를 대표하는 위인들로 추앙받는 ‘탐라사절’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느 해 탐라사절은 전라도 곡성(谷城)의 한 대감에게 초대를 받았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 대감은 탐라사절의 명성을 듣고 그들의 재주를 보고자 했다. 대감은 우선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한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관으로서의 절절한 기운과 수려한 용모, 몸 전체에서 기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첫눈에 그 사내가 풍채의 양유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따로 재주를 청하지 않았다. 뒤이어 대감은 고홍진에게 대대손손 번창할 명당자리를 알아봐 달라 하였다.
“그럴 수 없사옵니다.”
“무어라?”
고홍진의 대답에 화가 난 대감이 당장이라도 하인들을 불러 매질을 하려하자, 고홍진은 대감 조상들의 묏자리 지형을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기가 막히게 묘사했다. “이보다 훌륭한 명당은 없으며 3대는 능히 출세 길을 달릴 자리”라고 조언했다.
기분이 좋아진 대감은 탐라사절의 비범함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국태를 안채로 불렀다. 자신의 며느리가 몸이 약해 걱정이라며 진맥을 부탁했다.
당시에는 진맥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외간 남자가 아녀자의 손목을 잡지 못했다. 때문에 진국태는 다른 방에 앉아있는 대감 며느리의 손목에 묶인 실을 잡고 진찰해야만 했다. 잠시 맥을 잡던 진국태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 큰 일 입니다.”
“응? 무슨 일이란 말이냐!”
“대감님 자부는 이미 죽었습니다. 맥이 잡히지 않으니 흡사 놋쇠의 맥이옵니다.”
진국태의 말에 놀란 대감이 서둘러 며느리가 있는 건너 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크게 놀랐다.
대감의 며느리가 진국태를 무시해 그를 시험하기 위해 실을 청동화로의 다리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대감은 즐거운 듯 크게 웃었다. 그리고 또 무엇을 보여줄까 기대하며 문영후(文榮後)를 바라보았다. 문영후는 그런 대감의 표정을 읽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문영후는 마당으로 내려가 곡성(谷城)이라는 글자를 바닥에 큼지막하게 썼다. 다시 자리에 앉은 문영후는 의미심장하게 대감에게 말했다.
“대감 제가 이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저 글자를 지워 보겠습니다. 제가 해낸다면 저에게 곡성의 현감 자리를 주시겠습니까?”
“으잉? 가만히 앉아 글자를 지우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좋다. 그 청을 들어주마.”
시간은 흘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감은 역정이 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툭툭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맑던 하늘에서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감은 문영후의 재주를 높이 샀다. 그리고 문영후를 곡성 현감으로 임명했다.
‘제주읍지’에 내려온 이야기지만 실제 문영후는 과거시험을 거쳐 곡성현감으로 일하게 됐다.
-미래를 점치는 복서(卜筮) 문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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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후는 시문(詩文)과 천문학(天文學)에 조예가 깊어서 미래를 예언하고, 적중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조선판 ‘노스트라다무스’였던 복서(卜筮) 그는 앞을 내다보는 예지능력이 뛰어나 집 앞은 언제나 자신의 미래를 불안히 여겼던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그의 이러한 능력은 짐작컨대 어린 시절부터 제주도 밤바다에서 별을 보며 스스로 천문학을 깨우쳐 기후 변화를 알아내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문영후는 곡성현감이라는 의미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곡성’이라 불렸다. 그렇다면 2년여 가까이 곡성현감으로 일했던 문영후는 과연 곡성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문영후는 현감으로 부임하고 얼마 뒤 곡성의 한 여인을 탐하고자 마음먹는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혼인한 상태였다. 문영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현감의 권력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문영후는 기회를 보고 있다 여인을 억지로 자신의 처소로 끌고 왔다.
“꺄악! 왜 이러십니까?”
“이 년….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지아비가 있는 몸입니다.”
“크크크. 시끄럽다. 그러니 더욱 널 취해야겠구나.”
문영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여인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강제로 관계한다. 게다가 빼앗은 여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관아의 노비로 등록해 첩으로 만드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여인의 동생이 부리는 노비와 함께 간통하도록 했다. 상상할 수 없는 변태적 생활을 즐겼다.
이 사실을 처를 뺏긴 남편이 전라 감사에게 의송(議訟·감사 또는 암행어사에게 제출하는 탄원서)을 올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고 숙종이 직접 의금부에 지시를 내려 곡성현감 문영후를 잡아 오도록 했다.
-전라 감사 장계로 문영후를 나문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곡성 현감(谷城縣監) 문영후(文榮後)가 백성의 아내를 빼앗아 그 첩(妾)의 동생 인 종(奴)으로 하여금 번갈아 간통하게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 수령을 둔 것은 백성의 아내를 빼앗게 한 것이 아닌데, 그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를 엄하게 징벌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숙종실록, 1675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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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돌아와 과중하게 부과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지도록 힘쓴 노력과 그의 뛰어난 재주가 높이 평가돼 탐라사절이 됐다. 그러나 문영후가 곡성에서 저지른 악행이 제대로 알려졌다면, 과연 그를 제주의 자랑, ‘탐라사절’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는 역사학과 한국미술사를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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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목) 1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