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앞에 선 이세현 작가.

전쟁과 분단, 개인적 상실과 우주적 사유를 한 가지 색으로 응축해온 이세현 작가가 광주에서 처음으로 ‘붉은 산수’의 흐름과 확장된 세계를 펼쳐낸다.

보문복지재단 동곡뮤지엄은 개관 5주년을 맞아 오는 10일부터 내년 2월22일까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세현을 초청해 광주·전남 첫 개인전 ‘Beyond Red-기억중독’을 개최한다.

전시 제목의 핵심 개념인 ‘기억중독’은 기억이 감정을 낳고, 감정이 다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순환 구조를 뜻한다. 사회적 사건부터 개인의 상실까지 서로 얽혀 생성된 붉은 풍경의 층위를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세현은 전통 산수화 방식에 현대적 시각을 더해, 자연 풍경을 넘어 전쟁과 분단, 상실의 기억을 화면에 쌓아온 작가다.

그의 ‘붉은 산수’는 군 복무 시절 야간투시경으로 본 비현실적 풍경에서 출발했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장면을 바탕으로 시대의 상처를 하나의 색에 응축한 회화 세계로 주목받아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 연작 ‘비트윈 레드’(Between Red)와 ‘비욘드 레드’(Beyond Red) 약 30여 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Beyound Red - 024SEP01’

‘Between Red - 016AUG01’

‘비트윈 레드’는 DMZ, 철책선, 감시초소 등 분단의 지형을 붉은색으로 기록하며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드러낸 작업이다. 한동안 ‘금기의 색’이었던 ‘붉은 색’을 다시 꺼내 정치·사회적 폭력과 시대의 비극을 조형적으로 보여준 초기 대표작이다.

반면 ‘비욘드 레드’는 붉은 산수의 시선을 사회적 현실에서 더 넓은 감정과 우주적 사유로 확장한 연작이다.

별빛, 은하, 바다, 고향의 풍경,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흔적 등 개인적·정서적 이미지가 화면을 채우며, 상처 너머 존재의 근원성과 세계의 무한함을 탐구한다. 고향 상실과 유년의 단절 같은 오래된 기억이 자연·우주의 이미지로 다시 번역된 전환점이기도 하다.

두 연작은 전쟁과 분단의 역사적 풍경에서 출발해 존재·감정의 풍경으로 나아가는 붉은 산수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눈을 감은 인물 초상 약 30점과 드로잉·습작 70여 점이 더해져, 작가의 사고 과정과 조형적 탐구가 아카이브처럼 펼쳐진다.

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가 ‘마음의 고향’이라 말해온 광주에서 여는 첫 개인전으로 의미가 깊다. 대학 시절 마주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은 그의 예술관을 결정적으로 형성한 경험이었고, ‘예술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이번 전시는 그 출발점과 확장된 세계를 함께 보여주는 자리다.

개막 당일인 10일에는 작가가 참여하는 아트토크도 진행된다. ‘붉은 산수’의 형성 배경, 작업에 스민 기억의 의미, 최근 확장된 사유의 흐름을 작가의 언어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정영헌 보문복지재단 이사장은 “한때 금기의 색이던 ‘붉은색’이 예술가의 손에서 상처를 넘어 회복과 사유의 색으로 되돌아온 뜻깊은 전시”라며 “관람객들이 깊은 감동과 성찰을 경험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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