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가자” “가면 안 되지”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황량한 무대. 낡은 옷과 낡은 넥타이, 해진 중절모 외에는 가진 게 없어 보이는 두 남자.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 또한 닳고 크기도 작아 불편해 보인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계속된 반복과 어긋남이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언어 외에는 특별한 게 없다. 하나의 축으로 집결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아주 일상적인, 이해할 수 없는, 허튼 소리 같은 대화들만 오갈 뿐이다. 시간과 약속장소까지도 헷갈리는 두 남자. ‘고도’를 기다리는 것만은 의기투합이다. 극의 줄거리가 특별한 것도 아니며 극적인 사건도 없다. 막이 내릴 때까지 반복적이며 소통 부재의 말들을 끊임없이 내뱉을 뿐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사뮈엘 바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막막함이었다.

유명한 작품이니만큼 잔뜩 기대하며 객석에 앉았는데, 가슴만 답답해졌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끝없이 반복되는 두 남자의 기다림처럼 나 역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사람인지, 물건인지, 꿈인지, 허상인지. 만약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얼굴인지, 어떤 모습인지.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기 위해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어서 빨리 고도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막이 내릴 때까지, 고도만을 기다리다 돌아오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사실주의 극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형식에 참신함을 평가받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올리기 전부터 여러 연출가들에게 상연을 거절당했으며 배우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부조리극의 대명사.

작품의 구체적인 의미 파악이 어려워 유럽의 대도시 관객들에게도 수수께끼만을 던져줬다는 작품 평처럼,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은 고도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책꽂이를 정리하다 다시 만난 ‘고도’는 애잔함이었다.

1953년 1월,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 된 지 4년이 지난 1957년. 단지 등장인물에 여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샌 퀜틴(San Quentin) 교도소에서 공연됐을 때, 그 곳에 있던 재소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쓰여진 작품이라며 열광했다는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고도는 바깥세상이다! 빵이다! 자유다!” 1천400여 명이나 되는 재소자들이 눈물로 외쳤다는 일화가 있는 것처럼, 작품의 대사와 장면들이 애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고도’의 상징적 의미 때문에 난해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의미를 밝히지 않음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됐다는 작품 해설처럼, 그 어떤 의미로 살며시 다가와 안겼다.



어느새 한해의 마지막 달, 12월.

그 무엇, 그 어떤 것, 한 해를 시작하며 꿈꿨던 그 무엇들을, 머리로만 꿈꾸며 머리로만 계획하며 살아온 건 아닌가 싶다. ‘내일부터 꼭 해야지! 아니 모래부터는. 아니, 다음 달부터는!’ 습관은 우리의 모든 이성을 무디게 한다는 작품 속 대사처럼 우리 또한 습관처럼 되뇌며 무디게 살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는 망각한 채, 단지 꿈꾸며 기다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 이젠! 오지 않은 고도만을 기다리다 막을 내려야 할 것 같아 아쉬운 12월이다. 또 다른 고도를 꿈꾸게 하는, 새해로 향하는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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