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도 잊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잊힌다. 사진이나 글을 찾아서 보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을 이길 수는 없으니 더욱 아쉽다. 열차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열차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을 따라 견학을 하러 갔던 때다. 지금은 단어마저도 사라진 듯한 ‘구역’(새로 만들어진 광주역을 ‘신역’이라 부르면서 옛 광주역을 그렇게 불렀다)이었다. 거기서 디젤 기관차를 처음 봤다.

열차를 보면 시골 아이들이 생각난다. 열차를 보고 마냥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때로는 열차를 따라 뛰던 아이들. 열차를 타는 건 특별한 일이어서 까만 교복을 입을 정도가 되어 집을 떠나거나, 도시 구경을 갈 때나 탈 수 있었으니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싶었다. 그런데 학교를 서울로 가게 된 친구를 배웅하러 광주역으로 나갔을 때는 나도 시골 아이였다.

철길은 열차만 다니는 곳이 아니라 걷는 길이고 놀이터였다. 철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고 심부름도 다녔다. 못을 납작하게 눌러주기도 했다. 침목은 그사이가 너무 어정쩡해서 한걸음에 하나씩 딛기에는 너무 좁아 종종거려야 했고 한걸음에 두 개를 건너뛰기에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자갈을 밟을 수밖에 없었는데 발을 헛디디거나 신발이 상하기도 해서 차라리 레일 위를 걷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랐다.

직장을 다니면서 이용한 새마을 열차는 각별하다. 널찍한 좌석과 서비스가 있는 특실은 타고 있는 사람마저 달라 보였다. 그렇지만 새마을 열차의 진정한 강점은 식당이었다. 정부청사가 있는 과천을 자주 가야했던 약간은 무거운 출장길에 그나마 여유를 준 곳이다. 수원역에 내려 지하철로 과천 정부청사까지 가는 날이면 마치 대단한 특권을 받은 것처럼 꼬박꼬박 식당칸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쉽지만 시내를 통과하는 철도가 위험하기도 하고 도시 운영에도 지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중앙정부의 비용지원이 필요한 거의 모든 사업 목록에는 ‘도심 철도 이설’이라는 사업이 있었다. 오랜 숙원사업은 해결됐고 철길은 ‘푸른 길’로 모습을 바꿔 시민의 곁으로 돌아왔다.

남아있는 철길도 빨라진 열차에 맞춰 바뀌었다. 서울까지 가는 시간을 절반 이상 단축하느라 새로운 길을 냈다. 다음에 멈춰야 할 도시까지 최대한 빨리 가야하기 때문에 산을 뚫고 평야를 가로지른다. 그동안 찾아갔던 크고 작은 마을들을 들러 갈 겨를은 아예 없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들은 느림이 주는, 때로는 불편함이 줄 수도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잊는다. 빠름을 선택한 대신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산과 들의 아름다움은 방음벽 뒤에서 사라지고 터널은 길어졌다. 역방향 좌석과 수시로 여닫는 출입문 옆 좌석에 앉아 가는 불편함은 온전히 승객의 몫으로 되돌아왔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소소한 할인은 추억으로 남았다.

세상 돌아가는 경우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옛것의 정취들이 조금씩이라도 남아있으면 좋겠다. 이용객이 적은 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수단이 서울에 빨리 가려는 사람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많은 시간을 열차에서 보내는 승객들을 위해 더 안락하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도심을 지나는 철길은 느리지만 정감이 있다. 철도원이 서 있는 건널목이 그렇고 눈길이 스치는 지붕 낮은 집 안마당이 그렇다.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는 잘도 자고 옥수수는 잘도 큰다던 동요만큼이나 철길 옆 좁고 긴 밭이랑에선 상추도 고추도 잘도 자란다.

경전선이 주는 여유도 좋다. 비록 마주 오는 열차를 피하려 머물기도 하고 송석정 가는 길에 내리던 입교역에는 이제 열차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드들강도 지나고 예당평야도 지나고 태백산맥 문학관에도 데려다준다. 언덕을 올라갈 때도 바쁠 게 뭐 있냐는 듯 예나 지금이나 그저 한가롭다.

오래되고 이용가치가 떨어진 것들은 사라진다. 반면 오래된 것에서 맛과 멋을 찾는 사람들은 알리고 보존하고 심지어 복원을 하기도 한다. 한번쯤 이용해 보는 것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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