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1(토)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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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선생은 거리의 투사, 통일운동가 등으로 각인돼 있다. 선생은 평생을 거리에서 떠돌며 백두산 호랑이 같은, 사자 같은, 아니 황해도 구월산의 장산곶매 같은 삶의 여정을 보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늘 민족·민중·애민사상이 똬리를 틀었다.
노나메기 세상, 선생이 우리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다. 노나메기는 ‘너도 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이처럼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있을까 싶다. 그냥 잘사는 게 아니라 올바로 잘 사는 세상, 이것이야말로 선생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 같은 선생의 철학과 사상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리라. 노래의 탄생은 선생의 시집 ‘젊은 날’에 수록된 장시 ‘묏비나리’에서 비롯됐다. 선생이 쓴 시의 원작을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로 변형했고, 여기에 당시 전남대생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1980년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주화운동 현장엔 반드시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었다.
더러, 선생을 로맨티스트로 평하는 이도 있다. 필자도 공감한다.
그는 평소 고매한 인품과 예술적 미학을 소유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때문일까. 선생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유신시절 서울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시인 김지하와 미술사학자 유홍준, 춤꾼 이애주, 소리꾼 임진택, 가수 김민기 등이 그들이다. 최근엔 화가 신학철과 가수 정태춘·전인권, 영화인 양기환과 시인 송경동 등이 그를 따랐다.
물론 통일운동가로서 선생의 행적은 하나의 산맥이요, 큰 강이다. 하지만 문학적 측면에서 볼 때도 그냥 지나치고 갈 수 없는 위치다. 앞서 말한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이 수록된 ‘젊은 날’말고도 ‘이제 때는 왔다’,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등의 시집이며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부심이의 엄마 생각’,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같은 산문집, 그리고 ‘장산곶매 이야기’, ‘따끔한 한 모금’, ‘버선발 이야기’ 같은 옛이야기 책 등이 그것이다. 또 어려선 축구선수가 꿈이었고 젊은 시절엔 영화감독을 꿈꾸었다는 선생은 영화 극본을 묶어낸 책 ‘단돈 만원’, ‘대륙’, ‘쾌지나 칭칭 나네’ 등도 있다.
특히 선생이 남긴 수많은 저서들의 행간을 보면, 그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이 오롯이 읽혀진다. 선생은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을 처음 만들어 쓴 것도 바로 선생이다.
이 뿐인가. 선생이 쓴 책에는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같은 어여쁜 순우리말들이 가득하다. 그중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어른들한테서 들어 익힌 것도 있지만 그 스스로 애써 궁리해서 만든 것들이 적잖다.
또 한 분의 위인이 떠났다. 어쩌면 지금은 위인이 필요 없는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대도 아니고, 공공연히 대통령에게 ‘놈’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일 수 있는 시대니 말이다. 다만 아쉬운 건 지금도 대통령에게 ‘놈’자를 붙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묻는다. 군사정권이 국민들을 탄압할 때 선생처럼 국민을 위해 소리 한 번 질러본 적 있는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해 온 백기완 선생, 당신께 주어진 ‘90년간의 숙제’는 하실 만큼 하셨다. 이제 투쟁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편히 잠드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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