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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860년에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조림’으로 불리기도 한다.
선종이 들어와 문을 연 통일신라 때, 우리나라 선종의 종갓집으로 한국 불교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은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림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 미술사 혹은 문화사에서 장흥 보림사가 갖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만약 9세기 신라 하대의 문화를 논하면서 장흥 보림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엉터리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5m 높이의 쌍둥이 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맨눈으로 봐도 두 탑의 높이가 다르다. 남탑은 5.4m, 북탑은 5.9m다.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동그란 보륜의 숫자 때문이다.
천년이 넘도록 쌍둥이 탑으로 서 있다가 1934년 일제의 엉터리 복원으로 일란성 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로 바뀌어 버린 것. 193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사진에는 남탑과 북탑의 보륜이 각각 4개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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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두 탑은 이란성 쌍둥이 탑으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쌍탑 사이에 있는 석등은 지붕돌에 새긴 귀꽃 등의 장식이 수준급으로 함께 국보 44호로 지정됐다.
통일신라 말에 제작된 국보 석탑과 석등은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있어 한국 석탑과 석등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쌍탑이 세워진 8세기-9세기 무렵, 탑의 제작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탑의 높이와 규모가 작아진다. 높이 축소와 더불어 구조에서도 간략화가 진행된다. 탑의 규모가 작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찰에서 탑의 기능이 약화했음을 시사해 준다.
초창기의 위용 있는 탑이 작은 규모로 바뀐 것은 예배대상이 탑에서 불상으로 옮기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통일신라 이후 사찰의 규모가 작아진 점도 반영이 되었지만, 예배대상의 주가 불상으로 바뀌는 추세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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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란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스투파를 가리킨다.
석가모니가 죽은 후 사리와 병, 재를 모신 무덤 10개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무덤을 스투파, 지금의 탑이라 한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에 인도 아소카 왕이 사리가 안치된 8개의 사리탑을 열어 이를 8만 4천개의 사리로 나눠 탑에 봉안하게 됐다. 이후 스투파, 탑의 숭배가 일반화됐다.
지금은 불상이 예배의 중심이지만 원래는 스투파인 탑이 예배의 중심이었다. 우리나라에도 643년 자장법사가 부처의 물건들을 신라에 가져와 경주의 황룡사, 울산의 태화사, 양산의 통도사에 모셨다고 한다. 이것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확실한 스투파이다.
-‘피눈물 흘린 철불’…비온 뒤 흘러내린 쇳물이 와전-
국보인 쌍둥이 탑의 아쉬움을 채워 줄 수 있는 국보가 보림사에 또 있다.
철로 만든 국보 117호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이다. 통일신라 말, 철을 재료로 만든 철불이 유행했는데, 이 불상은 통일신라 철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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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석가모니의 인간적인 모습과 ‘붓다’(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의미)의 이상적인 모습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불상의 이미지는 이상적인 부처의 상과 당시 사람들의 자화상이 중첩돼 나타난다.
이상적인 부처의 상에서 불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자화상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기존의 불상과 달리 얼굴에 나타나는 신비성이 줄고 신체의 파악이 불확실한데, 이 점은 9세기 불상 양식의 공통점이다. 눈꼬리는 길어지고 입술은 두꺼워졌으며, 무릎은 넓고 반대로 손은 작다. 옷 주름은 잔주름이 도식화되었다.
이 불상의 얼굴은 권위로만 치닫는 것이 아니라 사실주의적 표현기법이 발전해 나가는 통일신라 불상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국시대 불상은 따뜻하게 다가서는 불상이 아니라 위엄과 권위로 지배하는 불상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삼국을 조화롭게 통치하기 위해 불상의 모습에 변화를 줬다. 종교적인 위엄이 설정되고, 사실적 기법이 나타났으며, 여기에 관능미가 두드러지면서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이 완성된 것이다. 위험과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관능미를 혼합시켜 백제와 고구려를 안심시켰다.
보림사 비로자나불좌상의 두툼한 입술, 커다란 귀 등에서도 부처의 위엄이 느껴진다.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쥐어 비로나자불의 수인인 지권인(智拳印·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 있는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한국전쟁 때 피눈물을 흘렸다는데, 이는 비가 온 뒤 흘러내린 쇳물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왼팔 뒤에 ‘대중이년무인’(大中二年戊寅)의 명문이 양각돼있다. 신라 헌안왕 2년, 858년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김수종이 왕의 허락을 받아 불상을 조성했다는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신라 시대에 지방 유지가 개인 재산으로 불상을 조성할 만큼 불교가 전국적으로 퍼졌음을 보여준다. 당시 쇠 2500근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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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불에게 소원을 빌고 지장전(지옥의 문을 지팡이로 두드려 중생을 지옥에서 살려내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신전)을 지나 보림사 뒤편으로 향하면 울창한 비자나무 숲이 있다. 300년이 넘은 비자나무 5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힐링의 공간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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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는 경사가 급하지 않아 누구나 걷기 쉽고,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림사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보림사의 아름다움은 가을도 좋지만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흘리고, 뿌리고, 발길 닿는대로 마음이 이끄는 순간 떠나도 좋다.
<신광재 역사문화전문기자는 대학에서 고고학과 한국미술사, 한국사를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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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목) 14: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