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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뭐가 잘못됐다는 거요?. 도대체 어떤 놈이 저에게 뭐라고 합디까?.
뭐를 조심하라고 합니까?.”
“…뭐라고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곤란하네만 내 생각에 한동안 어디 가서 쉬었다 왔으면 싶네.”
“저는 굵고 짧게 살 생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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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되든 박형은 나에게 개의치 말아 주시오.”
당시 광복군 제5지대 군사조장 박기성(朴基成, 1907-1990)이 나월환(羅月煥, 1912-1942 나주시 왕곡면 출생) 대장에게 이처럼 틈만 나면 귀가 따갑게 충고를 했다. 하지만 나월환은 평소 가깝게 지냈던 다섯 살 연장자 박기성의 염려를 단숨에 물리쳐 버렸다. 이날 이후 박기성은 일체 그에게 아마 말도 하지 않았다. 나월환의 성격을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했던 나월환, 박기성, 이하유는 상하이·류저우 등지를 무대로 함께 지하공작을 전개 후 광복군에 편입한 동지들이다. 제5지대 주축이었던 나월환과 이하유(1909-1950)는 걸핏하면 하찮은 일로 다퉜고, 화해를 시키기 위해 중재를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1942년 2월28일 광복군 보급창고 자물쇠가 파손됐다. 창고 안을 샅샅이 조사했더니 마대 2장이 분실됐을 뿐 다른 도난품은 없었다.
다음날 3월1일, 기념식이 끝난 후 호종남 부대에서 영화 관람이 있었지만 나 대장의 행방이 묘연했다. 밤새도록 나 대장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중국 경비사령부에서 나와 조사가 시작됐고, 며칠이 지난 후 나 대장의 싸늘한 주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광복군 사령부에서 5분 거리의 연화공원 우물에서 건진 마대 속에 나월환의 시체가 나왔고, 다른 마대에는 나 대장의 사물이 넣어져 있었다.
정훈조장 이하유를 따르던 박동운이 영화를 보고 있던 대원들의 눈을 피해 나 대장의 후두부를 둔기로 때려 숨지게 했다. 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장의 암살사건으로 광복군 전체가 동요됐고 살인자 박동운과 이하유, 이해평 등 9명이 중국 경비사령부에 구속됐다.
사건이 있기 전인 1940년 초, 중국 서안과 중경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 金元鳳)와 임시정부의 광복군, 무정부세력의 ‘한국청년전진공작대’(대장 나월환)가 항일무장단체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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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조직이 갖춰진 조선의용대와 반대로 수뇌부만 정비된 광복군은 한국청년진지공작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이 전개됐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과 국공합작을 통해 일제와 맞서기 위해 전투력이 갖춰진 그들이 필요했고,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더 절실했다.
본격적으로 손을 뻗친 쪽은 조선의용대였다.
1940년 12월31일, 조선의용대 2지대 부지대장 이자인을 단장으로 의용대 대원들이 청년전지공작대를 방문했다. 임시정부측에 이 정보가 들어갔고, 김구를 비롯한 이청천, 이범석 등이 긴급회의를 열어 접촉을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승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이었다.
조선의용대가 서안에 도착한 다음 날, 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하겠다고 공식 발표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발 빠른 정보력과 인맥의 성과였다. 곧바로 나월환은 대원들을 단속했고 서안에 온 의용대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 김학철이 펴낸 ‘격정시대’에 나월환이 당시 행동을 상세히 적고 있다.
“나월환 대장이 자기 부하들이 붉은 물이 옮길까 봐 의용대원들과 접촉을 은밀히 단속했다. 그 까닭에 양쪽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 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나월환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청년전진공작대는 광복군이 아닌 조선의용대에 합류했을 것이다.
대원들의 성향은 조선의용대와 가까웠지만, 무정부주의자였던 나월환은 사회주의보다는 민족주의 계열에 호감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민족주의자 부하들에게 목숨을 잃을 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선택은 1년 후 불행의 씨앗으로 잉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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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1일. 광복군 제5지대 결성식이 열렸다. 총사령부가 참석한 가운데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몸매의 지대장 나월환이 창설 선포식을 낭독했다.
“본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방략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광복군 공약을 준수한다. 광복군 명령을 절대복종할 것이다. 직무에 충실하며 조국 광복 운동에 지성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하기를 선서합니다.”
나월환을 지대장으로 부대장 김동수, 군사조장 박기성, 정훈조장 이하유, 예술조장 한유한, 공작조장 이해평을 간부로 한 제5지대는 서안에 본부를 두고 하남, 하북성 등지에서 초모, 선전, 정보활동을 전개했다.
1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던 청년전진공작대의 광복군 편입은 30여 명에 불과한 광복군에게 큰 힘이 됐다.
실제 광복군 1, 2, 3지대는 간부만 있을 뿐 5지대처럼 병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5지대 지대장 나월환의 위상은 광복군에서 누구보다 높았다. 이를 시기하던 정훈조장 이하유와 공작조장 이해평 등 10여 명이 모의한 후 3·1절 기념식을 틈타 지대장실로 들어가 나월환을 암살했다. 이 사건은 광복군 전체에 커다란 동요를 가져왔다. 주력부대로 성장해 가던 5지대의 지대장이 암살되고 여기에 핵심간부들이 연루됨에 따라 5지대 활동이 마비됐다.
사건이 발생한 후 한 달 만에 광복군 총사령부는 제5지대를 기존의 1, 2지대와 통합시켜 제2지대로 개편했다.
나월환의 뒤를 이어 제2지대장에 임명된 이범석은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 장관과 국무총리가 됐다.
나월환이 암살된 후 임시 5지대장이 된 송호성은 광복 후 육군 최초의 장성인 준장이 됐고 정부 수립 후 육군 총사령관이 됐다.
만약 나월환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이범석처럼 정치적 역량이 있었다면, 국방부 장관도 가능했을 것이다. 못해도 육군 최초의 장군은 나월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조직한 청년전지공작대의 대장으로 추대된 나월환은 일제가 아닌 부하의 손에 중국 땅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16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중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김구 선생이 나월환의 유해를 가지고 들어와 서울 봉은사에서 사십구재를 지낸 후 고향 나주로 가져갔다.
동고동락했던 박기성은 생전에 나 대장이 사랑했던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 대장은 정식으로 장가는 안 갔어. 갈 시간도 없었다는 게 맞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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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없었던 건 아닌데 그 시기에 장가를 가는 건 사치와 같았어. 그래서 나 대장은 일요일에 그 여자를 집으로 자주 불렀어. 중국 여자였는데 음식을 성의껏 만들어 부대원들에게 내놓곤 하였어. 부인으로도 볼 수도 있고, 애인으로도 볼 수 있지. 그런데 아쉽게도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어.”
정훈장교 박기성의 말처럼 나월환은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기념패에 “하늘의 뜻으로 함께하게 됐다”는 내용이 새겨진 유품이 남아있다. 대한민국의 육군 스타가 되지 못했지만, 나월환은 하늘의 별이 돼 조국 대한민국을 밝게 비추고 있을 것이다.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는 역사학과 한국미술사를 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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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목) 1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