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와 아가씨는
가시가 있어야 존재를 증명한다
까시는 굳은살로 돋은 까칠한 성미를
위장하고 있고
가시는 속눈썹 같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가냘프게 드러낸다
밀향이 로얄젤리로 모아질 때
아가씨의 사랑이 싹트는 시절임을 알고
아까시가 꽃타래로 선물하는 것이니
숨기고 싶은 새빨간 부끄러움이
아가씨 가슴에 스며들어
거짓말 같이 피어난 하얀 꽃
아까시와 아가씨는
수줍음으로 부러움을 사는
부드러은 가시가 인연의 촉매일 것이다.
(시집 ‘늘그막의 살 길 사는 길’, 마을, 2024)

[시의 눈]

아까시는 가시로 화사한 사랑을 증명하는 듯합니다. 오월 훈풍 피어난 꽃은 화려하지만 성깔 또한 가시처럼 숨기지요. 그게 돋을새김 된 아까시, 부드럽고 부끄럼타는 아가씨, 이 둘이 오버랩 됩니다. 아가씨 사랑이 움틀 땐 아까시 같은 꽃타래로 향을 뿌리지만, 배반하면 찌를 듯 다가오지요. 나 어린 청춘 때였네요. 이웃 동네 한 아가씨는, 호호 부끄러움 반, 콕콕 찌르기 반으로 날 만나면 자주 웃었더랬습니다. 그 장난끼가 결국 사랑으로 변했지요. 밀향이 짙어오는 어느 봄날의 하교길, 난 진등 고갤 넘다 배가 고파 아까시 꽃술을 따먹고 취했지요. 그러다 아까시 꽃보다 눈부신 흰 카라의 그녀가 나타나 화들짝 무안 놀랐습니다. 허어, 그 인연이 지금의 내 아내라니요. 박종철 시인은 전북 남원 출생으로 1987년 ‘월간문학’ 등단 후 시집 ‘낮은 소리 하나’(1988), ‘사람 만나지 않은 날들’(1921) 등을 냈습니다. 그는 느리게 걷는 능선이듯 침잠하는 자아를 한 발짝씩 진솔하게 엮어가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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