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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골목, 양림동을 걷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골목, 양림동을 걷다
[정지효 여행작가의 남도투어 Happy-Bus-Day]<4>광주 시내버스 금남55번 ‘양림교 정류장’
사직산 자락 호남 근대화 출발점
전통한옥·서양식 건물 공존
근대 역사문화 마을

구불구불 오래된 골목길 벽
벽화로…시로… 채워
쇠락하던 동네서
핫플 변신
  • 2026. 06.25(목) 19:43
  • 정지효
  • 재생 준비중
새롭게 단장한 펭귄마을 전경
정지효 작가
도시의 시간은 결코 균일한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어떤 거리는 인공지능과 첨단 산업이라는 맹렬한 궤도를 타고 미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지만, 또 다른 어떤 골목은 100년 전의 어느 맑은 날에 조용히 닻을 내린 채 머물러 있다. 우리를 숨 가쁘게 몰아세우는 치열한 일상 속에서, 여행자는 종종 그 기묘한 시간의 단층을 탐험하고 속도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선다.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다른 속도로 걷고, 다른 질감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금남55번’ 시내버스는 일상과 여행,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아주 훌륭한 타임머신이다. 유스퀘어(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광주역을 거쳐, 번잡한 도심인 금남로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을 미끄러지듯 통과한다. 창밖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경하다가, 버스가 광주천을 건너 ‘양림교’ 정류장에 도착해 뒷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낯선 산책로의 입구에 서게 된다. 공기의 냄새와 발밑에 닿는 보도블록의 촉감마저 미세하게 달라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금남55번 버스 양림교정류장은 일상과 여행,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펭귄마을로 향하는 타임머신의 출입구다./김애리 기자

광주 사직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양림동은 호남 지역 근대화가 태동한 출발점이자, 낡은 전통 한옥과 이국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근대역사문화마을이다. 1900년대 초반, 이름조차 낯선 동방의 작은 나라를 찾아온 파란 눈의 이방인 선교사들이 이곳에 들어와 둥지를 틀면서 작은 마을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가파른 언덕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인 ‘우일선(Wilson) 선교사 사택’이 울창한 숲을 등지고 그림처럼 서 있다. 1920년대에 회색 벽돌로 지어져 무려 한 세기의 맵찬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낸 그 건물 앞에서는 누구라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들이 고향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거대한 피칸나무 그늘 아래 서면, 시간의 지층이 쌓아 올린 묵직한 무게와 낯선 땅에 생을 바친 이방인들의 숭고한 헌신을 조용히 사유하게 된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조금 더 걸음을 옮겨 호남신학대학교 뒷산으로 오르면 도심 속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선교사 묘역이 나타난다. 수십 개의 소박한 비석들이 세워진 이 고요한 언덕은 죽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삶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인 공간에 가깝다.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학교를 세우다 짧은 생을 마감한 이방인들.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한 여행자였을 그들의 삶의 궤적을 찬찬히 짚어보노라면,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나 일상의 자잘한 근심들이 한낱 먼지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위안을 얻는다.

산 중턱에서 내려와 양림오거리 쪽으로 향하면, 언덕 위와는 전혀 다른 시대의 풍경이 또 한 번 여행자를 낯설게 반긴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1970-80년대의 짙은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펭귄마을이 나타난다. 이 독특하고 귀여운 이름의 기원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제법 뭉클하다.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동네 어르신들이 화재로 흉물스럽게 방치된 빈집 터를 치우고 텃밭으로 가꾸기 위해 뒤뚱뒤뚱 걸어 다니시던 뒷모습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쓸모를 다해 버려진 폐가전제품, 찌그러진 양은 냄비, 낡은 구두 등 온갖 잡동사니들은 마을 주민들의 투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손길을 거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적인 업사이클링 공예품으로 재탄생했고, 골목의 허름하고 오래된 벽들은 화려한 벽화와 시로 촘촘히 채워졌다.
양림문화샘터

펭귄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고장 난 시계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시계 벽이다. 초침이 멈춰버린 수백 개의 시계들은 마치 이 골목 안에서는 바쁘게 흘러가는 외부의 시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가난하고 쇠락해가던 동네를 예술로 구원한 것은 거창한 행정 기획이나 막대한 예산이 아니라, 버려진 것들을 거두어 자신의 삶터로 끌어안은 평범한 이웃들의 따뜻한 연대였다. 노년의 고단한 노동과 삶의 애환이 스며든 양림동 속 작은 마을은, 양림동을 대표하는 명소이자 가장 감각적인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매력적인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골목 곳곳에 입주한 청년 사장님들의 공방과 예술가들의 갤러리, 그리고 낡은 한옥을 개조해 원두 볶는 냄새를 풍기는 근사한 카페들은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개화기 시대의 모던 보이, 모던 걸 복장을 대여해 입고 골목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20대 여행자들과, 텃밭에서 상추를 솎아내는 80대 원주민 어르신의 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 다정하게 겹친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기꺼이 즐기는 청년들의 쾌활한 모습은, 양림동이 단순하게 박제된 근대 박물관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진화하는 거대한 유기체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인간은 편리를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새로 짓고 낡은 것을 부수려 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오래된 흔적에 자신의 새로운 서사를 덧대어 기억을 보존하려는 다정한 본능도 함께 지녔다. 양림동은 그 두 가지 본능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교차하는 동네다.
양림동 한복 다도 체험

100년 전 이방인들이 품었던 조건 없는 박애 정신부터, 잿더미가 된 골목을 폐품 예술로 꽃피운 평범한 이웃들의 따뜻한 연대, 그리고 그 오래된 이야기에 자신들의 취향을 더해가는 청년들의 창의성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다정한 풍경을 만들어낸 양림동의 좁은 골목길은, 우리 지역이 품고 있는 가장 단단하고 매력적인 인문학적 자산이다.

자, 그러니 방구석에서 스마트폰 화면만 무의미하게 넘기고 있기엔 싱그러운 이 계절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굳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비싼 비행기 표를 끊을 필요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운동화로 갈아 신고 시원한 아이스 커피 한 잔 손에 든 채, 지금 당장 금남55번 버스에 경쾌하게 올라타 보자. 덜컹거리는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사람들을 한가롭게 구경하다 양림교 정류장에 훌쩍 내리면, 오래된 미래와 낯선 과거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담장 너머로 살랑이는 초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골목 구석구석 숨겨진 펭귄들의 귀여운 인사를 받다 보면, 어느새 일상의 피로는 날아가고 잊고 있던 여행의 진짜 설렘이 우리의 발걸음을 구름 위를 걷듯 솜사탕처럼 가볍게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다.
정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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