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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으로 떠나는 여름방학 버스여행

2천년 전으로 떠나는 여름방학 버스여행
[정지효 여행작가의 남도투어 Happy-Bus-Day]<11> 광주 시내버스 매월16번
운전의 피로 해방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거대한 감각의 스튜디오 ‘마한유적체험장’
첨단 과학으로 복원된 고대 현악기 ‘슬’ 등 손끝으로 만지고 귀로 느끼는 생생한 역사
진열장에 박제된 과거 아닌 함께 완성하는 익숙한 우리도시가 준비한 놀라운 이야기
  • 2026. 08.20(목) 17:33
  • 정지효
  • 재생 준비중
‘매월 16번’ 버스와 ‘마한유적체험관 버스정류장’. /조영권 기자
여름방학이다.

여행작가로 살다 보면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이번 방학에 아이 데리고 어디 가기 좋으냐”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내가 지도에 없는 은밀한 계곡이나, 이제 막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해외의 어느 소도시쯤을 추천해 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나는 종종 아주 싱거운 대답을 내놓는다.

물리적인 이동 거리가 길다고 해서 여행의 밀도가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가 매일 딛고 서 있는 이 도시,
광주의 익숙한 풍경 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한 여행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여름방학 #신창동 #마한유적 #엄마랑 #아빠랑 #물고기잡기 ‘매월 16번’ 버스를 타고 갈수 있는 신창동 마한유적체험관. 체험관 내부에는 신창동 유적의 저습지와 중요 출토 유물, 토층을 재현했으며 물고기잡이, 현악기 연주 등 여러가지 체험 콘텐츠가 마련돼 있다.

이번 주말,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가족 여행자들을 위해 조금 특별한 시내버스 투어를 제안한다. 우리의 출발지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유스퀘어다. 거대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다른 도시로 훌쩍 떠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터미널 앞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타지로 향하는 대신 광주의 내밀한 속살을 향해 거슬러 들어가는 역발상의 여행이다.

우리가 올라탈 버스는 광주 도심의 주요 거점을 잇는 노란색 간선버스, ‘매월 16번’이다.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쏟아지는 쾌적한 버스 안쪽, 차창이 넓은 자리에 아이와 나란히 앉아보자. 버스가 광천동과 운암동의 번잡한 일상을 가로지르는 동안, 아이들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의 간판을 흥미롭게 관찰할 것이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강박과 앞차의 꼬리램프만 주시해야 하는 피로에서 해방된 부모는 비로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 도시에 대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눌 여유를 얻는다. 대중교통이 가족 여행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시선의 자유에 있다.

버스가 영산강 지류를 넘어 신창동 일대에 접어들면, 빽빽하던 스카이라인이 옅어지며 한결 차분하고 여유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유스퀘어에서 출발해 30여분을 달렸을까.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이다 마한유적체험관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 문이 열리는 순간, 맹렬한 매미 소리와 짙은 녹음이 우리를 온몸으로 반긴다. 유적지라는 단어에 지레 하품부터 하는 아이를 둔 부모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신창동 마한유적체험관은 과거 박물관들이 고수하던 엄숙하고 딱딱한 유리 진열장 중심의 전시에서 완전히 탈피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고대인들의 일상을 21세기의 첨단 기술로 생생하게 복원해 놓은 거대한 감각의 스튜디오에 가깝다.

마한유적체험관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 21세기 디지털 기술로 되살아난 2천년 전 마한의 일상이 펼쳐진다. 아이들의 발길을 가장 먼저 붙잡는 건 첨단 과학으로 복원된 고대 현악기인 ‘슬(瑟)’의 복원 전시 공간이다. 2천년 전 저습지 진흙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벚나무 악기의 파편은, 이제 정교한 복원 작업과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과거라면 썩어가는 나무토막 하나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시각적인 관람으로 끝났을 테지만, 이곳은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음향 체험 콘텐츠를 무척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스크린을 터치하는 순간, 유물의 재질과 구조를 분석해 정교하게 직조해 낸 진짜 과거의 울림이 공기를 가른다. 현의 소리가 퍼질 때마다 전면 화면에는 악기를 연주하며 잔치를 벌이는 고대인들의 모습이 미디어 아트로 피어난다. 청각적 자극이 시각적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몰입의 순간이다.

이어지는 농경문화 체험 공간 역시 입체적이다. 홀로그램으로 허공에 아른거리는 발화구의 불꽃, 관람객의 움직임에 맞춰 리듬감 있게 울리는 절구질 소리는 유쾌한 자극을 선사한다. 아이들은 이를 통해 역사가 진열장에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처럼 펄떡이며 살아 숨 쉬던 생생한 일상이었음을 온몸으로 감각하게 된다. 이 생동감 넘치는 체험들은 유물을 박제된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완벽하게 치환해 놓는다. 아이들은 역사적 연도를 암기하는 대신, 손끝으로 스크린을 만지고 귀로 고대의 파동을 느끼며 2천년 전의 사람들과 온전한 주파수를 맞추게 된다.

관람을 마치고 야외로 나오면 신창동 유적의 탁 트인 산책로가 이어진다. 2천년 전 사람들이 도토리를 줍고 벼농사를 지었을 그 흙을 밟으며 걷는 길. 고대의 거대한 시간 감각 속에 잠시 머물다 나오면, 우리를 옥죄던 일상의 자잘한 고민거리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같은 것들은 한없이 가볍게 증발해 버린다.

시내버스를 타고 온 짧은 시간 여행은 먼 이국에서의 휴가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정류장으로 돌아가 매월 16번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지루할 틈이 없다. 오늘 저녁 우리 가족의 식탁 위에서는 2천년 전 마한 사람들의 흥겨운 악기 소리와 신비로운 늪지대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자, 이제 전시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여름이 쏟아내는 찬란한 빛과 소리를 온몸으로 맞이하자. 눈부시게 푸른 여름날의 햇살이 우리를 감싸 안는다. 그 맑고 투명한 풍경 속으로 아이와 함께 성큼 걸어 들어가면 된다. 익숙한 우리 도시가 정성껏 준비한 가장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고요히 누워있던 유물들은 이제 사람의 체온과 손길, 그리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만나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시대를 맞이했다. 마한유적체험관에서 마주했던 ‘슬’의 복원 모델과 인터랙티브 음향 전시는 단순한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고대인들이 우리에게 남겨둔 일종의 미완성 악보 같았다. 그들이 축축한 늪지대 속에 묻어둔 낡은 파편이라는 악보 위에, 2026년의 눈부신 기술과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력이 더해져 마침내 하나의 온전한 음악이 완성된 것이다.
정지효 작가

우리는 흔히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여행이 이토록 불쑥 우리에게 스며들 듯 다가오기도 한다. 거창한 목적지나 치밀한 계획 없이 시작된 오늘의 짧은 나들이가 그러했다. 일상과 비일상을 나누는 경계는 사실 우리의 굳어진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얄팍한 선은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황금빛으로 내려앉는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온한 숨소리와 그 위로 덧입혀진 오후의 다정한 풍경. 이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찰나의 장면 역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누군가에게 기어코 발굴해 내고 싶은 찬란한 유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매일 덜컹거리며 달리는 시내버스 안에도, 이토록 눈부신 여행의 순간들이 무수히 적재되어 있다.
정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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