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광주송정역의 깊은 지하 승강장을 벗어나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 출구를 향해 한 걸음씩 올라오는 과정은 그 자체로 꽤 극적인 체험이다. 지하의 서늘하고 정적인 공기가 지상의 후끈하면서도 활기찬 초여름 밤공기로 임무를 교대하는 그 찰나, 여행자의 심박수는 가볍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출구를 딛고 완전히 지상으로 올라선 순간, 눈앞에는 KTX와 SRT 열차가 전국 각지의 수많은 서사를 싣고 내달리는 거대한 광주송정역사가 웅장하게 서 있다. 수많은 이방인과 현지인이 뒤섞이는 이 숨가쁜 스테이션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시대를 연결하는 가장 역동적인 관문이자 타 지역 여행자들에게 설레는 남도 여행의 첫 걸음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 거대한 기차역을 등지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련된 도심의 불빛 뒤로 전혀 예상치 못한 다채로운 미식의 아지트가 화려한 막을 올린다. 바로 ‘1913송정역시장’이다. 이곳은 본래 1913년 송정리역의 개역과 함께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1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매일송정역전시장’이었다. 대형마트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쇠락해 가던 이 오래된 공간은, 낡은 것을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파괴적인 개발 대신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는 영리한 리뉴얼을 거쳤다.
수십 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방앗간과 제분소, 철물점의 손때 묻은 간판들이 젊은 창업가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 매장들과 다정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과거의 묵직한 유산 위에 청춘들의 경쾌한 취향이 겹겹이 레이어드된 이 독특한 골목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쉼 없이 달려온 20대 청춘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고 무장해제되는 세련된 뉴트로 무대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이 시장이 가진 가장 직관적이고 친절한 매력은 입구에서부터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시장 초입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여행자를 반기는 것은 상가 이름이 한꺼번에 가지런히 적힌 대형 안내 표지판이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헤맬 필요 없이, 미리 SNS에서 점찍어둔 유명 맛집의 위치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시장의 규모가 체력을 소진할 만큼 과하게 넓지 않고, 아담하면서도 깔끔하게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무척 합리적이다.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첫 집으로 뛰어드는 대신, 느긋하게 골목을 끝까지 한 바퀴 둘러보며 출출한 여행자의 허기를 행복하게 채워줄 미식 라인업을 전략적으로 구상할 수 있다는 점은 젊은 여행자들에게 꽤 매력적인 장점이다.
시장 골목 탐색을 마치고 본격적인 미식의 스테이지에 오르면, 가장 먼저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국밥 골목이 발길을 붙잡는다. 1913송정역 시장을 대표하는 오랜 전통의 인기 국밥집을 필두로, 여행의 피로를 뜨끈하게 달래주는 해장국집들이 정겹게 모여 있다. 뽀얀 국물에 야들야들한 고기가 담뿍 담겨 누구나 속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곰탕, 든든한 포만감을 자랑하는 진한 순대국, 그리고 뚝배기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칼칼한 콩나물국밥까지. 투박하지만 다정한 남도의 소울푸드들은 헛헛한 위장을 가장 먼저 따뜻하게 덥혀주며 본격적인 먹방의 포문을 기분 좋게 연다.
|
|
뜨끈한 국물로 속을 달랬다면, 이제 달콤하고 고소한 탄수화물의 축제를 즐길 차례다. 최근 이곳은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빵지순례’의 성소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1913송정역 시장의 전국적인 유명세를 톡톡히 실감하게 만드는 곳은, 매시간 빵이 나오는 타이밍마다 골목에 긴 줄이 늘어서는 수제 식빵 전문점이다. 얼마 전 유명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더욱 핫해진 이곳은, 오직 천연 발효종만을 고집하여 느리지만 건강하게 빵을 구워낸다. 갓 구워져 나온 따끈한 식빵을 반으로 가르면,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지는 쫄깃한 식감과 천연 발효종 특유의 깊고 구수한 풍미가 코끝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투박해 보이는 식빵 한 덩어리가 이토록 섬세하고 경이로운 미각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 기차를 타고 찾아온 여행자들의 수고로움을 완벽하게 보상해 준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이곳 디저트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할매니얼(할머니+밀레니얼) 세대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하는 수제 디저트들이다. 먼저 국내산 쑥 고유의 깊은 풍미를 세련되게 담아낸 ‘쑥스 초코파이’가 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뻔하고 인공적인 단맛 대신 은은하고 진한 쑥 향이 입안 가득 파도처럼 밀려온다. 포슬포슬하면서도 촉촉한 쑥 비스킷 식감 사이로 부드러운 마시멜로나 달콤한 크림이 사르르 녹아내리는데, 겉을 감싼 초콜릿 코팅의 쌉싸름함이 더해져 지루할 틈 없는 미각의 레이어를 완성한다.
여기에 발길을 맹렬히 붙잡는 또 다른 보석 같은 메뉴가 있다. 바로 정성껏 쑤어낸 수제 팥을 베이스로 만든 ‘구슬 양갱’과 청량한 ‘곤약젤리’다. 영롱한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구슬 양갱은 한입에 쏙 들어가는 앙증맞은 크기에 팥 고유의 우아하고 은은한 단맛을 품고 있어, 입안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번지게 한다. 투명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살아있는 곤약젤리 역시 가벼우면서도 상큼한 매력으로 무장해, 묵직해진 위장을 산뜻하게 환기해 준다.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건강한 단맛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이 매력적인 수제 디저트들은 100년 된 낡은 노포의 풍경과 어우러져 청춘들에게 가장 달콤하고 세련된 스몰 럭셔리를 선사한다.
하늘이 푸스스한 군청색으로 물들고, 시장 골목 위로 오렌지빛 알전구들이 팝콘처럼 톡톡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분위기는 한층 더 로맨틱하게 무르익는다. 초여름의 선선한 밤공기 속에서 즐기는 야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여름밤 야시장의 절대 강자는 단연 화려한 불쇼를 자랑하는 ‘불꼬챙이 삼겹살 야채 말이 구이’다. 얇고 쫄깃한 대패 삼겹살 속에 아삭한 양배추와 깻잎을 빈틈없이 돌돌 말아 구워내는데, 화려한 토치로 불맛을 입히고 매콤달콤한 소스를 바를 때마다 피어오르는 훈연의 향은 지나가는 이들의 도파민을 격렬하게 자극한다.
게다가 야장의 낭만을 완성하는 조연들은 골목 곳곳에 풍성하게 포진해 있다. 갓 튀겨내어 한입 베어 물면 바사삭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다양한 튀김류,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게 지져낸 고소한 전, 그리고 가쓰오부시가 춤을 추는 뜨거운 타코야끼까지. 각자의 강렬한 냄새로 치열한 후각 쟁탈전을 벌이는 완벽한 길거리 안주들 앞에서는 누구나 무장 해제되고 만다. 보기만 해도 청량한, 얼음장처럼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을 목젖 가득 들이켜면 여름밤의 끈적한 열기조차 가장 힙하고 유쾌한 축제로 치환된다. 연인과 나란히 서서 꼬치를 나누어 먹고 맥주잔을 부딪치는 일상의 풍경마저, 하나의 근사한 청춘 스냅샷이 된다.
도시의 일상은 늘 빈틈없이 빡빡하게 흘러가고, 우리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서서히 감각이 무뎌져 간다. 하지만 퇴근길, 혹은 다가오는 주말을 맞아 가벼운 차림으로 광주 지하철 1호선에 올라타는 아주 작은 일탈의 용기만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맴도는 방구석에 누워 의미 없이 스마트폰만 넘기기엔, 여름밤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청량한 공기와 야시장의 낭만이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지하의 깊은 승강장을 지나 지상의 1913송정역 시장 골목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 우리 모두는 100년이라는 묵직한 시간의 결이 만들어낸 근사한 무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뚝배기 국밥으로 시작해, 쫄깃한 천연 발효종 식빵과 달콤 쌉싸름한 쑥스 초코파이, 그리고 탱글한 수제 구슬 양갱으로 입맛을 황홀하게 깨우고, 노란 전구 불빛 아래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바삭한 튀김과 시원한 생맥주를 부딪치는 밤.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떠나는 한 여름밤의 지하철 여행이 우리의 여름을 가장 완벽하고 강렬한 색채로 꽉 채워줄 것이다. 고민은 행복한 여행의 시작을 늦출 뿐이다.
정지효 작가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2026.10.15 (목) 1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