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원作 ‘자연 생성기’

강운作 ‘파랑-모개도’

임남진作 ‘연서’

조영대作 ‘어머니의 보자기’

추상(抽象). 여러 사물 또는 개념 따위의 개별자들로부터 공통점을 파악하고 추려낸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동양이나 서양에 나타난 추상의 어원적 의미에는 모두 대상으로부터 본질적인 것, 명료한 것을 응축해 끌어내며 비가시적인 세계를 상징화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전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프랑스 앵포르멜 추상형식이 거의 동시에 유입, 새로운 미술형식으로 공존하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추상미술의 시작이 서구의 추상미술 영향을 받아 출발했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접근이다.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로 확장하고 있는 동시대 추상미술 양상이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다음달 2일까지 무안군오승우미술관(관장 박현화)에서 열리는 ‘抽象, ABSTRACT, 추상’ 기획전시다.

이번 전시는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추상의 어원적 의미, 동양사상의 전통과 정체성 그리고 전후의 여러 심리적 요인과 변화된 시각적 현대성이 갈등과 기대로 교차하는 중 우리의 추상미술이 배태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참여작가인 강운의 작품 속 형상과 색은 중의적이지만 이내 합일을 이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작가의 시선은 구름이나 물방울, 공기와 같이 가변적이고 연약한 대상에 머물러 있다. 작가로부터 시작된 상처나 아픈 기억은 대상에 투사되고 관조와 사유, 치유의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출품작 ‘파랑’ 연작은 여수 섬 장도에서 진행된 레지던시 기간 그려진 것이다. 3백여 개 섬으로 둘러싸인 여수 바다의 색인 동시에 천태만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하나의 붓으로 그린 추상화다.

미디어아티스트 신도원의 ‘자연생성기’에는 코끼리, 로봇토끼, 식물, 알 수 없는 기호와 텍스트 등 평면 드로잉이 등장한다. 이 드로잉은 1초에 30여 작품이 유영하듯 입체적으로 구현된다. 거친 선으로 그려진 형상들은 원시성을 표현하며 인간과 비인간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문명 이전의 순수한 생태계를 드러낸다.

임남진의 ‘연서’, ‘오래된 편지’, ‘든 자리 난 자리’ 연작은 최근 제작된 추상 작품이다. 그녀의 이전 작업인 감로탱화에서 보여준 삶의 끝없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접힌 상징적인 쪽지 안에 감춰져 있다.

정정주는 빛의 움직임과 형태를 입체적인 구조로 추상화해 시각과 응시로부터 빚어지는 소외와 갈등, 초월적 존재인 숭고에 이르기까지 그 실재와 상징적 의미에 천착한다. 풍부한 자연과 태양으로 가득한 남도의 빛은 역사의 상처와 갈등을 미적 아름다움으로 승화하고 있다.

흑백 도트로 이뤄진 정송규의 후기 추상화에서는 수묵화처럼 넉넉한 여백이 존재한다. 엄격한 가부장 제도 속에서 살아남아 호남지역 1세대 여성 추상작가로서 어렵게 뿌리 내린 작가 내면의 강한 기조와 자유로운 환희의 감정이 내포돼 있다.

어머니의 보자기를 모티브로 하는 조영대의 회화는 추상화이면서 동시에 정물화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그는 선과 색, 빛이 여백과 함께 어떤 방식으로 대상의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내는가에 집중했다. 작품 ‘어머니의 보자기’ 속 두터운 물감의 깊은 바탕으로부터 올라오는 선의 본질은 모든 인간의 그리움과 슬픔의 원천이자 근원인 모성성을 상징한다.

최정윤의 설치작품은 마치 쇠검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쉽게 부서지고 변화하는 소금이라는 물질로 칼을 대체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무기, 전쟁, 권력, 종교, 역사와 같은 남근적 상징을 무화시킨다. 인간과 자연의 무의식적 욕망을 다루고 본질적인 속성을 끌어내기 위해 대상을 소금으로 변화시킨 것은 그만의 독특한 추상화적 코드다.

사진 작가 한정식이 선택한 작품 명제에는 강원도 원주, 경기도 가평, 황악산 직지사 등 구체적인 지명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공간을 특정할 수 있는 확실한 지표를 작품 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워버림으로써 추상화시킨다. 물, 바람, 나뭇잎, 공기, 돌, 파도와 같은 자연의 흐름은 셔터와 함께 공(空)의 세계로 회귀한다.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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