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세계’

“5·18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 후대를 향한 우리의 부르짖음. 이를 담아내는 것은 화가에게 큰 자부심이라 생각해요. 광주 오월과 관련된 사진을 방 안 빼곡히 붙여 놓으면서 매일같이 작업에 몰두했어요. 마치 오월 현장에 있는 것 같았죠. 광주 그리고 5·18이 어쩌면 내게 숙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수묵화의 거장 김호석 작가의 초대전 ‘무등의 묵: 검은 울음’이 오는 24일까지 전남대 용지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검은 울음’은 이번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다. 송진을 태워 만든 먹에 물을 풀어 사용하는 수묵화는 검은 빛깔의 물감만을 이용하는데, 이는 어둠이나 죽음의 색을 넘어선다. 작가는 우주의 무한공간, 모든 것을 태워 얻을 수 있는 가장 생명력 넘치는 색을 ‘검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상극인 불과 물이 만나 조화를 이뤄 상생의 길로 나아간다. 이게 먹이 갖는 철학이거든요. 생명의 원천이자 모든 탄생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도 ‘검은 수묵’이 제시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전시에서는 신작 21점을 포함해 총 29점 작품을 선보인다.

그중 ‘마지막 입술’은 고등학생 열사 문재학과 안종필의 최후 모습이 담긴 노먼 소프 기자의 사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광주항쟁 마지막 날, 총에 맞아 쓰러진 이들 옆에 먹다 남은 단팥빵이 떨어져 있는 걸 보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한 저 빵이 과연 어디로 갔을까. 저들의 흔적을 따라가보고 싶었죠.”

바로 옆 그림 ‘알 수 없는 세계’에는 단팥빵을 에워싼 20여 마리 개미의 모습이 담겨있다. 먹다 떨어뜨린 빵이 산산이 분해돼 개미굴로 옮겨지는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죽음과 또다른 삶, 아픔과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힘에 대해 성찰하게 됐다는 게 작가의 이야기다.

이밖에도 전시장에서는 자연의 본질과 생명의 숭고함을 되새기며 역사와 현실, 이 땅의 모습 등 정신적 가치를 내용으로 삼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18일 전시가 열리는 장소에서 작가 초청 학술 심포지엄도 열린다. 작가 작품세계에 대한 논의와 함께 민중의 삶과 시대정신이 그의 예술관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광주 정신은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됐는지 살펴본다.

발제에는 전시기획자 김허경(전남대)을 비롯해 김병헌(소촌아트팩토리), 홍지석(단국대), 고영재(5·18민주화운동기록관), 김영순(광주문화재단), 조인호(광주미술문화연구소), 임종영(광주시립미술관),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박성천(광주일보), 정인서(광주서구문화원)가 참여하며, 종합토론은 박구용(전남대)이 좌장을 맡아 진행된다.

민병로 5·18연구소장은 “예술을 통해 민주·인권·평화 가치를 조명하는 이번 기획전이 광주시민, 특히 5·18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큰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며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재조명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최명진 기자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